나는 삶의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은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은희경, 새의 선물 중에서>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도 삶의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나를 불러 인생에서 몇 번 주어지지 않는 기회에 대해 넌지시 언급한 날이었다.
기회를 선택하기 이전 삶이 어떤 기회를 제공하는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국적, 성별, 부모님, 자연환경, 시대적 상황. 그러면 나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왕이면’(已往이면)이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한자 그대로 이미 지나가버린 상황. 그러니까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거나 상황이라면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꿀 수 없는 것에 힘을 쓰면 바꿀 수 있는 것에 힘을 쓸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 내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에는 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내게 긍정적인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하고 부정적인 것이라면 물리칠 수 있는 자기 기준이 있어야 한다. 선택의 순간이 내 앞에 불현듯 나타났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두어야 한다. 적어도 어떤 모습으로 살지 않을 것인지는 생각해야 한다. 적당히 휩쓸리듯 지내다가 의도하지 않은 내 모습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의 무능은 행동의 무능을 초래한다. 바로 앞에 닥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 선택의 문제가 어려운 것은 선과 악, 좋고 나쁜 것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구국의 영웅이 되느냐 마느냐.’ ‘살인자가 되느냐 마느냐.’와 같은 극명한 문제보다 구국의 영웅이 살인자가 되기도 하는 명확하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 살아있는 사회라서 그렇다. 숨 쉬고 살아가는 인간이 모여 있는 곳은 유기적일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처음엔 선한 의도로 시작되었던 것이 점점 욕심으로 변하기도 하고 한때는 최선이라 생각했던 나의 신념도 가치가 변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기도 한다.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던 부류의 사람들도 내가 그 위치에 올라서며 그들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이 계속적으로 점검하고 살피는 나의 가치판단 기준이다.
명확하지 않은 경계는 스스로 정해서 지켜야 한다. 요즘 뉴스에서 보고 듣는 ‘악의 모습’이 이제는 일상화가 되어버려서 선한 사람으로 살겠다는 평범한 다짐도 너무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 남을 해치지 않는 선한 사람으로 살겠다. 자기 기준을 무엇으로 두느냐에 따라 선택의 좋고 나쁜 것이 바뀐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생 가치는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내게 있어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를 의미한다. 나의 상식을 벗어나지 않고 내 자유의지로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겠다. 하지만 힘과 강요에 의해해야만 하는 거라면 나는 하지 않겠다.
퇴사하기 전 내가 '자기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던 그 사람은 항상 '높은 자리'를 미끼 삼아 기회를 말했어요.
일보다 충성을 바라던 그 사람의 요구가 잘못인지도 헷갈려서 저는 늘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기회란 것이 오히려 퇴사를 하게 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일에 '무조건적인 충성'은 없었거든요. 특히나 힘에 의한 충성 강요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