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비루한 존재가 있다면 사랑에 빠진 연인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처럼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도 없으며, 우정처럼 긴 시간을 함께하리란 보장도 없다. 사랑이라는 연약한 감정 하나에 기대어 그 감정의 생명력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할 수 있는, 그래서 스쳐 가는 인연이 될 가능성이 더 많은 한시적인 관계일 뿐이다. 수많은 사랑의 형태 중 연인은 가장 짧은 사용기한을 가지는 관계가 아닐까.
사랑에 빠진 연인이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은 더욱더 초라하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연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거나 몸을 포개며 하나가 되려고 애쓰는 것, 꽃과 선물을 전하는 것, 필요할 때 상대를 보살펴주는 것이 전부이지 않는가.
연인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먼저 노트에 초안을 썼는데, 단숨에 3페이지를 훌쩍 넘겼다. 하지만 그 글을 편지지에 옮겨 쓸 수는 없었다.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이 글에 담겨있었지만, 그래서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마음이 까만 글자가 되어 흰 종이에 옮겨진 광경은 너무나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실패한 블랙코미디 같았다. 내가 썼지만 내 것이 아닌 듯 낯설었고,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음과 언어로 표현된 마음 사이의 이질감은 편지가 아닌 말로 바꾸어 전한다 한들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실패한 문장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노트 속에서 잠들었다.
어느 주말 밤, 연인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 <Her> 를 보았다. 많이 피곤했던 연인은 영화를 절반도 보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영화를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연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나에게 연인의 잠든 얼굴은 영화보다 더 흥미롭고 감동적이었다. 고요하게 잠든 그를 보며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그 어떤 스킨쉽보다도 강렬하게 그를 감각하는 순간이었다. 행복감과 경이, 감사와 벅참, 스쳐지나가는 지난 불행의 기억까지. 연인의 얼굴은 많은 기억과 감정을 일렁이게 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쯤 연인이 살풋 잠에서 깨어 나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연인의 어깨를 적셨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시 잠이 들었고, 나는 그가 깨지 않게 어서 눈물이 멈추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영화 <Her> 에서 주인공인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이다. 테오도르는 고객의 정보와 편지를 보내려는 목적과 상황을 기반으로 대신 편지를 쓴다. 테오도르의 편지는 아름다웠고 의뢰인의 마음을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타인을 통해 쓰여진 글이 진심을 전달하는 더 합리적인 방법인지도 모른다. 감사와 사랑 같은 감동적인 마음들이야말로 온전히 전달되기 힘들다는 것은 진정한 아이러니다. 전달할 때나, 전달받을 때나, 우리는 대략적인 느낌만을 주고받을 뿐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으로 감정의 빛깔과 무게와 온도를 가늠하여 상대의 마음을 수신한다.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때로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늘 혼잣말로, 혼자 쓰고 읽는 글로 사라져버리곤 하지만, 언젠가는 그에게 전달할 수 있는 편지를 쓰고 싶다
그를 사랑함으로써 생겨난 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은 적당히 숨기면서, 그에 대한 마음만을 전하는 방법은 없을까.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모두 지워내고 나면 어떤 말이 남을까.
그는 나를 ‘내사랑’이라고 부르고 때로는 내 안에 들어온 채로 “상해야 사랑해”라고 부른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요. 이런 날엔 내사랑이랑 손잡고 홍대를 걸어야 해요.”라고 말하고 친구나 가족과 외식을 했다가 맛있는 집을 발견하면 “내사랑을 꼭 데려가고 싶어요. 꼭 같이 가야 해요.”라고 한다. 함께 길을 걸을 때면 길 안쪽에 나를 두려고 순간이동 하듯 내 왼쪽, 오른쪽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매일 아침이면 잠은 잘 잤는지, 춥지 않게 옷을 입었는지 확인한다. 나는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같은 의미임을 안다.
언젠가 그에게 편지를 전할 날을 꿈꿔보지만 그건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 또다시 무력함을 느끼고 만다. 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행복과 기쁨만큼의 무력함을 돌려받는 실패의 경험이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모든 순간, 우리의 맞닿음을 과장하지도 낮추지도 않고 표현하는 일. 닿아있는 몸과 마음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걸까. 이 감정의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에, 딱 한 번은 성공하고 싶다. 그것은 이 시절의 나에 대한 가장 진실한 기록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