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의 주동우 배우의 팬이다. '소년시절의너'를 보고 그녀의 팬이 되었다. 그래서 넷플릭스를 돌아다니면서도 이 영화가 주동우 배우의 출연 때문인지 눈에 띄었지만 결국 관람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로맨스인데다가 신파일 것만 같은 편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볼 게 너무 없다고 느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결국 리스트에 올려놓았던 이 영화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볼 거면서 오래도 돌아간다, 나도 참.
1. 사랑의 맹점
보다보니 흡입력 있고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로맨스 영화가 흥하려면 결국 인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지만 일반 대중은 캐릭터의 매력으로 모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여기 두 주인공은 서로의 입장이 너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남자와 여자의 동상이몽이란 이런 건가 했다. 남자는 외면적인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여자의 마음을 놓쳤고, 여자는 조건을 본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 마음 속 깊은 속에 사람의 마음이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건 따지던 여자도 그 모든 조건들이 필요없어지며 사람 하나만을 바라본다. 하지만 여자의 조건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자신이 되어야하는 이상향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 맞기만 하면 여자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로의 타이밍이 이렇게 안맞는 것이다.
여자의 조건에 맞추고자 했던 남자의 노력이 이루어지려고 하는 그 순간 여자는 그렇게 따지던 조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남자의 진실된 애정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남자에게 그런 추상적인 말은 이해가 될 리가 없다. 자신의 사랑이 상대의 조건을 맞춰주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멘붕이 오는 것이다.
남자는 외적인 요소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했고 여자는 남자의 애정이 중요했던 것인데 남자는 여자의 마음 깊이 숨겨진 진짜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잘 모르는 것이 인간 관계이고, 사랑하는 관계로 규정지을 수록 오히려 그걸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나를 알아야지'라는 그 말이 결국 그들의 관계의 함정이 되어 버리는 것만 같다.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서로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현타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2. 만약은 없다. 그것이 운명인 것이니
현재 시점이 되어 남자가 수많은 만일의 가능성을 논하며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에 대해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만일 내가 그 곳에 갔다면, 내가 그러지 않않다면, 등등 과거에 다른 선택을 하면 헤어지지 않았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의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결론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했던 행동의 반대를 행하면 현재와는 정확히 반대의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장담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지하철 앞에서 헤어졌지만 지하철을 탔다고 한들 결코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여자를 상실해 남자는 미친듯이 게임을 만들었고 그가 성공하는 것을 보며 그녀도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상실은 서로의 인생에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팔자라고 생각한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결정하고 그 선택이 곧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 다른 선택을 어떻게 하는 것이 현재에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는 것은 결국 과거를 후회한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후회가 결국 인생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보면 그 후회는 결국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을 거다.
그 후회를 했기 때문에 그도 더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 상실이 없었다면 그는 어느것도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삶에서 꼭 필요한 삶의 부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점에서 나는 여자의 입장에 동감한다. 헤어질 팔자였기 때문에 꼭 그 순간이 아니었더라도 결론은 헤어짐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헤어짐은 새로운 성장을 위한 필수였으니까.
총평 주저리주저리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인생의 귀인은 맞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먼 훗날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잘 살고 있는 모습으로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악착같이 베이징에서 버틴 것 같았다. 뭐랄까 두 사람의 애틋함은 아주 깊은 사랑을 했던 나 자신의 풋풋한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결혼을 하여 자녀가 있는 남자에게는 그 시절이 가난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만큼 자유로웠던 시절이 없다고 생각할 테고, 여자 또한 그만큼 진득하게 사랑한 경험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다시 재회해 다시 교제한다고 해도 결국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이유도 과거와 같지만 헤어지게 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왜인지 더 찬란했던 나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 순간에 언제나 함께 했었던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포인트는 사람이 아니라 순간인데 말이다. '그 순간'을 함께한 '서로'가 아니라 '서로' 함께 해쳐나갔던 '그 순간'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시기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다시 그 순간으로 간다면 더 잘 대해줄 자신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말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의 마음가짐으로 과거를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가면 나는 또다시 그 철없고 무모했던 시절의 마음가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과거에 철없는 나 자신에서 변화한 모습이기에 과거로 돌아가면 더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철없던 과거의 내가 없으면 현재의 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삶의 궤적과 같아서 내가 한 만큼 되어 있고, 견딘 만큼 평화가 오는 게 인생이다. 그들의 현재도 서로를 상실해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의 현재는 과거 서로를 많이 사랑했고 대가 없이 사랑했던 기억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현재 시점에서의 만남은 후회로 남아있던 서로의 관계 속에서의 감정들을 갈무리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회였던 것 같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응원하며 다음 phase를 밟을 수 있지 않을까. 나 또한 두 사람 모두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