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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ca n May 29. 2024

지금 떠나오는 세계로부터, 감각하는 경험

<방금 떠나온 세계>(2021, 김초엽)


저도 당신과 같습니다.
제게 아주 가까운 사람이 몸을 바로잡고 싶어 해요.
그건 누가 보아도 끔찍한 결과로 향해 가고 있어요. 저는 불안하고 두려워요.
 그를 잃을까 봐 두렵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그를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사랑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 <로라> 중


 이 단편 속에 등장하는 행성들은, 하나 같이 우리가 ‘방금 떠나온 세계’처럼 느껴진다.​

 마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행성의 중력권을 벗어나며, 멀어져 가는 제3의 시선으로 보는 것만 같은 느낌.​ 어딘가 꼭 닮은 모습인데, 멀어지면서 볼 때에야 보이는 모습의 세계.


 꽤 많은 단편집들이 어떤 작품의 제목으로 서명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방금 떠나온 세계>는 이 제목 하나 모든 것을 관통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을 이것으로 대체해 보아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록된 단편들의 배경이 낯선 가공의 우주임에도 기시감이 한껏 느껴지는 건, ‘우리의 뒤틀리고 모순된 세계’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낯설고 소수라는 이유로 소외되고 평가절하된 것들에 같은 눈높이로 다가가는 작가의 서술은, 서로 다른 시점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 인상은 담담하기 그지없지만, 그 속은 한없이 따뜻한 검은색이거나 보라색. 흔하지 않고 ‘따뜻하다’는 직관과 거리가 먼 까닭에 오해를 받는 그런 아련한 색이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은 그를 설득해보려고 할 테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내리겠죠.

그러면 당신은 혼란스러워지고,
당신 역시 어떤 특정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이제 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여전히 당신과 같은 혼란을 느낍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 긴 여정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그곳에도 결국 해답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 <로라> 중에서

 결국 방금 떠나온 세계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고 충돌하는 세계이고 동시에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려 애처로운 몸짓을 부리는 곳이다.​


 냄새 입자로 의사소통을 하는 세계, 가시광선에 의한 시각이 아닌 데이터로 감각하는 세대, 행성을 좀먹으며 기생하는 존재, ‘환상감각’을 현실화하려는 사람들,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공의 틈’을 공유하는 자매,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의 세대와 존재 사이의 메세지.*   

 하나하나의 세계는 언뜻 서로 달라 보여, 무어라 한 문장으로 줄여 말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모든 작품은 하나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품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 위 나열한 순서대로 각각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숨그림자  /  마리의 춤  /  오래된 협약  /  로라  /  캐빈 방정식  /  최후의 라이오니​​

 닮은 모습이 많은 등장인물들, 그중 어떤 존재는 나의 부모님을, 또 누군가는 지금은 나와 멀어진 몇몇 사람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어주었다.


“저를 만나기 전에 다른 모그를 본 적 있어요?”
“아니.”
“왜 못 봤다고 생각해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선생님도 이걸 경험하고 나서야 저를 이해했잖아요.”

...

사람들은 모그들의 존재를 갑작스레 알아차렸고, 그 사실에 놀랐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그 사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 <마리의 춤> 중


 이 작품집은 SF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접했음에도, 굳이 SF라는 장르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로맨스 소설은 더더욱 아니다. ‘Romantic’이 아닌 어떤 존재에 대한 애정, 생명에 대한 애틋함.. 어쩌면, 그것보다 ‘소통’하고 ‘받아들이려는 몸부림’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L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L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 <로라> 중


 ... <로라>의 저 네 번째 문장은 단편집의 메인 카피로도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따금 생각나는 문장인데, 한편으로는 저 문장만 똑 떨어뜨려놓고 보면 '위의 몸부림'들이 모두  소수자의 연애소설로 치부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든다.-혼자만의 생각이길 바랄 뿐이다.


 사회가 작동하는 과정에는 법이나 제도도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마음에 더 근본적인 파문을 일으키는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세계 속에서 헤매는 존재들의 이야기는, '화성남, 금성녀'의 새로운 스타일 내지 연애감각 범위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친구, 가족, 연인을 비롯해 주변사람들에게까지, 온갖 이해가 되지 않는(듯한) 존재들에 대한 포용과 존중의 은유를 담고 있다. 섣부른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존재하는 것 자체에 대한 순수한 태도로.


 <방금 떠나온 세계>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행성이나 세계이면서, 또 한 편으로는 방금 떠나온 세계가 다름 아닌 '지구'고 우리와 '지구'라는 행성 역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수의 '그들'에게는 소수이고 기이한 것, 이질적인 타자로 치부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확장된다.​



 이 감각이 가장 현실적이고 확실하게 느껴졌던 건 <캐빈 방정식>이었다.  U시티 (신)시가지 한복판에 난데없이 들어서 있는 L백화점 대관람차는 그 기묘함과 익숙함의 중간 지점에 있다.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역시 마찬가지인데, 작품에서도 그런 장소로 등장한다.  작가의 출신지를 생각해 보면 그 '나름' 랜드마크(이지만 크게 회자되지 않는 장소)를 주제에 맞게 잘 접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이번 작품은 종이책과 e북을 읽으면서 동시에 TTS로 변환해 들어보았는데, 그 이질적인 인공음성이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회가 되는 분들은 한 번쯤 들어보는 건 어떨까 싶다.


 - 2021.11.3.~6. /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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