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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ca n May 07. 2024

촘촘한 도시와 고슴도치의 거리두기

익숙한 것들과의 거리 #2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을 적기 시작한 때는 앞으로도 끝날 기약이 없을 것 같은 겨울(2020)이었지만, 곧 세 번째 봄(2022)이 돌아오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종식을 전망하게 되었다.

 잠깐 돌아보아도 근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노력이 있었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서로를 분리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겪었는데, 어느새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벽까지 식당이며 주점을 메우고 불빛을 밝힌다.


 시대와 세대가 바뀌면, 그 이전의 것들은 바뀌거나 사라지게 되는 걸까? 3년 차에 접어들며 문득 들었던 고민이 무색하게, 날마다 수만 명의 확진자가 나와도 이젠 아랑곳하지 않고 붐비는 모습이 꽤나 익숙한 풍경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민폐며 주홍글씨를 씌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괜찮다는 눈치라 코로나19와의 거리는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다.


 학자들은 이번 코로나19를 중세 유럽의 흑사병에 견주어 이야기하면서, 촘촘하게 채워진 도시와 발달된 1일 생활권의 교통체계를 통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고들 말했고, 인류의 자연 파괴로 마주친 박쥐로부터 시작된 인수공통감염과 변이는 기후 위기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인류는 질병을 비롯해 다양한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이 꽤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분명 더 나아지기 위한 기술이었을 텐데 그 결과가 코로나19 세계 창궐이라니. 세계를 하루면 오갈 수 있는 시스템이란 게, 인간들이 바랐던 좋은 것뿐만 아니라 전염병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촘촘한 시대가 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밖으로 나서서 당장 버스정류장부터 시작해 회의실, 식당 가릴 것 없이 사람이 서있거나 앉을만한 곳이 있다 싶으면 참 효율적으로 빽빽이 준비되어 있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새로 만드는 기계나 공간들도 여전히 다닥다닥 붙은 의자를 놓고는 ‘거리두기’라고 사용을 막아놓은 모습은 언젠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것을 염두해서였을까? 아무 의도와 생각이 없는 ‘효율적’ 활동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게 적정거리와 속도를 놓쳐서 이런 사태를 맞이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한켠에 올라왔다 스러진다.  가운데를 비운 의자처럼, 촘촘하게 세팅된 도시 속에서 자의와 상관없이 거리를 두고 홀로 외로움을 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체온이 10년 단위로 0.03도가량 내려가 지난 200년간 0.6도 정도 낮아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술의 발달로 염증질환은 줄고 신진대사를 위해 스스로 발열할 필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200년 이후 현재, 2020년 코로나19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이전엔 아무리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들다고 말했던 이들도 만남을 통한 타인의 ‘온기’와 ‘정서’의 부재를 실감했고, 우리는 고도의 기술과 초포화 상태의 인구밀집, 편의성 등등 모두 ‘과잉’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문명의 이기를 통해 현생인류는 애써 스스로 온기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어졌고, 다른 사람의 온기는커녕 스스로 고생해서 발열할 필요도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기술적으로는 타인과 직접 만나거나 모이지 않은 채 혼자 살아가기에도 충분해진 것처럼, 온라인을 비롯해 각종 비대면 첨단기술이 대세고 미래인양 신성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코로나19 사태라는 역풍을 맞고 나서야, 우리는 바로 옆에 사람이 있었고 빽빽하게 붙어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연결을 끊어야 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그간 각종 편의를 위해 과다 사용해 왔던 기술들이 동시에 스스로를 과잉 상태에 처하게 했고 주변을 살피지 않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태초부터 생명체는, 그리고 인류는 한파를 비롯한 여러 생존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모여 살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시작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같이 붙어있지만 여름이 되면 좀 멀어지고 싶은 열기, 그렇다고 아주 영영 멀어질 수는 없고 밤이고 겨울이 되면 또다시 필요한 온기.


 체온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온도’라고 시작한다. 체내에서 물질대사의 산화 과정 결과 발생하여 몸의 표면으로 방출되는 것, 정온 동물은 체온 조절을 통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적절한 신진대사와 효소의 효율적인 작용, 추위로부터의 보호 등 여러 목적을 띄고 생명유지를 위해 우리의 몸은 적정온도를 끊임없이 유지한다. 사실 '나'라는 한 개체에서부터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시작되고 있던 것이다.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기의 거리를 찾아가면서 말이다.


 식물도 품종에 따라 너무 빽빽하게 간격을 좁히고 나면 생장에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우리는 그 ‘적정한 간격’을 고민해 볼 새 없이 앞만 보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지난 2년은 여러 가지의 적정함, 익숙한 것들의 환기를 뒤늦게 겪는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지향할 것이고, 그것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일 리가 없다. 우리는 최대 크기이자 최다 빈도의 행복을 바라며, 때로는 이를 위해 조금의 양보나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기도 한다.

 이런 번잡함은 자신을 위한 것일 때도 있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한 것일 때도 있으며, 더 나아가 그에 포함되지 않는 ‘너(타자)’를 위한 경우들도 있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쉽게 생각하거나 아예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 가치를 등한시하거나 속단·예단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뇌효율 이론(익숙한 것들의 생략)을 핑계로 들어보기도 하지만, 그걸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무마하기엔 이유가 꽤 초라하다.


 개인에서부터 모두가 또다시 ‘나 하나’만을 위한 단편적인 행동을 일삼으면 제2, 제3의 코로나19 사태로 향하는 지름길일 테고, 결국 그 결과는 공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연결’ 디지털시대이자 대우주시대로의 서막이라 불리는 2020년대에도, 여전히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생각한다.


 너무 익숙해진 속도, 잊어버린 거리감, 그러면서 등한시한 가치. 지난 3년은 사실,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이 원래 있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202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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