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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ca n Jun 02. 2024

당신의 기준에 모두가/모든걸 맞아야(맞춰야) 하는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 경험과 의식 #2

 

때때로 우리는 일련의 생활과 습관, 즉 일상에 변수를 맞닥뜨린다.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때도 있고, 삶의 배경 또는 패턴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인 경우도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는 여행과 같은 (일시적) 비일상이 있을 수 있고, 이사나 입사/이직/창업/퇴사처럼 장소나 패턴이 급변하는 사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운동, 모임, 공부처럼 자의에 따라 벌일 수도 있으며, 외부의 요인으로 인할 수도 있다. 자의가 아닌 외부로부터 발생한 변화나 자기 주도에 따라 이끌어가는 것 모두, 결과적으로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인데, 자의로 통제나 관리하지 못하는 변수들에 대해 꽤나 많은 이들이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야근인 출장으로 인해 독서모임이나 운동을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때도 있고, 급하게 준비해야 하는 어떤 일이나 이벤트/해프닝 때문에 변동이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지부터는 오롯이 자기 몫으로, 이미 벌어진 일(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포함한다.


 영국의 한 통계연구(Whitehall study)에 따르면, 공무원 조직의 계급별 사망률과 사망요인을 2차례에 걸쳐 분석해 본 결과 낮은 직급일수록 사망률이 높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현저하게 낮아져 그 차이가 0.5배에서 2배 범위에 달한다고 나타났다. 주된 요인은 심혈관계 질환, 상당수는 스트레스로부터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바로 직장에서의 자기주도성, 자율성이 적을수록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때문이라는 분석이 따라왔다.


 나는 꽤 상당 기간 운이 좋은 편인 때도 있었고, 그전에는 주어진 책임과 권한이 한정적이거나, 동시에 시야가 넓지 못해 세상의 많은 부분을 인지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덜 받는 편이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직장에 출근하기 싫다는 ‘월요병’을 불과 5년 전까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근 5년 사이 상황과 위치가 변하면서, 동시에 여러 이유로 남이 떠넘기는 일,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을 경험해 보았고, 그중에서도 불합리하고 잘못된 지시를 연달아 받아보며 왜 직장인들이 조직생활, 사회(정치)생활, 직장생활을 힘들어하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나는 일(직장)에만 함몰되어 사는 것의 불균형과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슬기롭게 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가 생겼으며, 운동과 독서, 몇 가지 사회모임 등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자기 기준과 논리로만 모든 것을 대하는 태도로부터도 한 발짝거리를 두어본 것이다. 설령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20년 전 딱 이맘때, 가평에서 난데없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 이야기를 들은 이래 잊을만하면 꼭 어김없이 생각이 난다.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힘든 단어인데, 고정된 자기 생각과 기준(침대)에 맞춰 타인을 늘리고 자르는 그 폭력적 논리는 좀처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겠다.

 그러다 문득, 요 몇 년 사이 든 생각은 ‘과연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렇게 해서 기뻤을까?’였다. 세상은, 타인은 만만하지 않다. 일개 개인이 좁은 식견으로 어떻게 세상 모든 것을 판별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석학들이 내놓는 연구결과도 ‘가설’이나 ‘이론’에서 아직 입증이 안되고 있거나, 심지어 ‘법칙’이라는 왕좌에서 왕왕 내려오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결국 자신의 기준을 무리하게 강행하면, 자기 스스로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게 마련이다.

 내 기준대로 삶이, 일이, 조직이, 그리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생각 자체가 맞는 것인지,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설령 그것이 정말 맞다고 해도.


 때문에, 사람은 변할 수 있(없)는가? / 변하(지 않)는가? 그것은 모두 맞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결국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고, 그 결과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놓은 책을 읽느라 새책은 구입할 예정이 없었는데, <숙론>(최재천 저)을 냉큼 샀다. 그렇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으려는 것이다”라는 메인 카피 때문이었다. 동시에 ’어떻게 마주 앉아 대화할 것인가‘라는 메세지는, 내가 근 몇 년 사이에 읽었던 또 다른 책의 연장선으로 이어졌다. 물론, 근래 나의 숙제는 ’무엇이 옳은지’가 중요한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이지만.



-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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