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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의사 가운을 입던 날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14)

by 김정훈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 열 네 번째 이야기 – 처음으로 의사 가운을 입던 날.

“이 친구들을 버리고 저희만 시험을 칠 수는 없습니다.”

의과대학 4학년 공부가 끝날 무렵 팔자에도 없는 농성을 하게 되었다.


PK 실습도 끝나고 본과 4학년 마지막 학기가 시작 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의사 국가고시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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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밀양에 단기간 숙소를 잡아서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다.


그런데 국가고시를 대비해서 모의시험과 중간고사를 쳤는데 성적이 바닥권인 몇몇 친구들이 있었다. 학교 당국에서는 이 친구들에게 과락의 성적을 매기고 졸업을 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이 정도 성적으로는 국가고시를 쳐봐야 탈락할 게 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렇지만 6년간 함께 울고 웃으며 이 시간을 준비해 왔는데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4학년 생 모두 밀양에 숙소를 잡아 놓고 함께 국가고시 준비를 하고 있다가 과락에 걸린 친구들 몇 명의 소식을 듣고 일제히 대구로 올라와서 학장실 앞에서 단체행동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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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과락을 시킨다면 우린 밀양에 자리 잡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학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한참동안 교수님들께서 의논하신 듯 했다. 그러나 학교의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과대표에게 얘기하여‘탈락 대상자들 개인별로 전담할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을 골라서 몇 명이서 조를 짜고 한 달 내에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릴테니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최종의견을 제안했다.


학생들의 결심을 보고 교수님들은 마지못해 기회를 주되 다음 모의고사에서도 일정 성적이 안 나온다면 그 땐 어쩔 수 없다고 분명히 못을 박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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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밀양에 있는 숙소로 들어가 그 때부터 탈락 대상자들 1명에 3~4명 씩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붙이고 하루 두 번 자체 특강을 하면서 한 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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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한 달이 지나 최종 모의고사에서 다행히 전원이 비교적 여유있게 컷오프를 통과했고 그 해 국가고시에서 우리 학번 졸업생들은 100% 전원 합격의 성적을 거두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보니 그 때 탈락 대상자 친구들은 제각기 자기 분야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자기 몫을 다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뿌듯하고 대견스럽다. 잠시 소홀했던 것이 자칫 잘못했더라면 일생의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1년 늦게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다고 무슨 큰 일이야 생기랴만 동기들이 함께 챙기고 좋은 분위기에서도 합격을 하지 못하면 자칫 후배들과 공부하면서 더욱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3수 4수 하다가 결국 장기수로 남아 의사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의과대학 도서관 구석에서 책과 씨름하는 안타까운 선배들도 가끔 있었기에 그 친구들과 다 함께 합격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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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파란만장한 늦깍이 의대생이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기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해가며 남편 뒷바라지를 한 아내의 수고야 말해 무엇하랴! 어린 아기를 돌보며 살림을 도맡아 애쓰신 장모님과 그리고 신동훈 교수님, 추원호 원장님, 박동만 원장님 등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 많은 분들 덕분에 나는 은혜 안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능력만으로는 살 수 없다. 능력이 있다면 굶어 죽을 일이야 없겠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죽음은 심장이 멎는 것 만은 아니지 않은가? 관계가 끊어지고 그 연결된 통로로 흘러야 할 그 무엇이 없다면 그 또한 죽은 것 아닌가? 산다는 것은 단지 생존한다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연결된 통로로 흐르는 그 무엇을 행복이라고, 한편으로는 은혜라고 믿는다. 성경의 시편을 쓴 사람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불렀다.

영생은 삶의 길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에 관한 문제다.


영생은 불로장생의 기독교 버전이 아니다.

그것은 욕심이다.

자기 인생에 마침표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본능적인 생존욕구를 종교적으로 포장한다고 미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결, 사람과 만물사이의 연결, 그리고 내 생각을 넘어선 어떤 것,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존중과 경외감으로 연결된 것이 영생의 본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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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관한 내 인생 멘토이신 이현래 목사님의 말이 더욱 진하게 다가 온다.

은혜는... 받을 때 감사하고 갚을 때 행복하다!


능력으로만 살지 않고 은혜로 사는 사람에게는 능력으로 경쟁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졸업하고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의 모병원인 동산의료원에 인턴으로 남기로 했다.


처음으로 실습 가운이 아니라 의사명찰을 달고 흰 가운을 입던 날, 나는 언제 이 가운을 벗게 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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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 가운을 벗게 될까?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부푼 꿈을 가지고 큰 포부를 밝히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언젠가는 이 일을 그만 두게 될 텐데 과연 어떤 상황에서 나는 이 가운을 벗어야 할까를 고민했다.


첫째, 엉덩이가 무거워질 때...

첫째, 다리를 절며 진료실로 들어오는 할머니를 보고도 벌떡 일어나 부축해 드리지 못할 만큼 엉덩이가 무거워 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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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환자의 외모를 보고 돈 생각이 날 때...

둘째, 환자의 행색을 보며 견적이 생각날 정도로 돈이 아쉬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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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더 이상 배우기가 귀찮을 때...

셋째, 환자의 몸을 다루는 사람으로써 더 이상 배우기가 귀찮아 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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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미련 없이 가운을 벗어야 한다고 그 때 마음에 결정을 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축하려고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환자를 보면 안 될 것 같고,


돈이 아쉬워서 환자를 보고 있다면 그런 의사에게 진료 받는 환자도 힘든 일이고 의사로서도 궁색한 일이 아닐까? (물론 전적으로 내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직업으로서 의사의 길을 가는 분들을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리고 사람을 내가 만든 게 아닌데 어찌 의사로 살면서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할까? 그것은 너무도 오만하거나 너무도 익숙하거나 아니면 지쳐 있는게 아닐까?


그 땐 잠시나마 가운을 벗고 재충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친 것이 아니라 배움의 열정 자체가 식은 거라면 의사가운을 완전히 벗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말이다. 나도 더 나이가 먹고 무료한 일상처럼 진료가 반복되는 어느 때가 된다면 이 첫 마음을 잊어버리는 때가 오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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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공공연하게 글을 쓰고 알리는 이유는 내게 혹여 그런 때가 온다면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나를 사정없이 날카롭게 이 글을 상기시켜 주면 좋겠다.


정말 그런 때가 온다면 조용히 가운을 벗어야지.


그 때는 텃밭을 가꾸어 거기서 나는 소출로 신선한 음식들을 만들어 필요한 분들과 나눠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때론 책을 읽고 때론 글을 쓰며 지내야지.


그 때가 되면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해가 뜨고 지는 숲속에 작은 동물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아야지.

무심히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녀석과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작은 새들과 함께 그렇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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