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12)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 열 두 번째 이야기 ㅣ 신경외과 I.C.U - 2 “채혈을 하면서... ”
깡마른 할아버지 팔에서 피를 뽑으며 내가 가진 진단도구들이 죄다 날카롭고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 채혈을 하는 일은 인턴 때의 일인데 채혈을 하면서 느낀 것들은 실습을 하면서부터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다.
지주막하 출혈(뇌출혈의 일종)로 수술을 받은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더니 힘겹게 고개를 돌리신다.
"할아버지 제가 지금 피를 좀 뽑을 텐데, 따끔하실 거예요. 그렇지만 제 마음으로는 할아버지가 얼른 회복되셔서 일반병실로 내려가시도록 기도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혈관이 좋은 분이어서 혈액 채취는 쉽게 끝났다. "수고하셨네요." 웃으며 인사를 하며 헤파린이 든 작은 병에 혈액을 담고 흔들며 돌아서서 언뜻 스치는 생각... PK실습 때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내가 가진 진단도구들은 왜 이리 하나같이 날카롭고, 차갑고... 딱딱한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손으로 하는 진단 방법이 참 마음에 든다. 온기가 있는 손으로 모든 진단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정확한 진단을 위해 지금의 의학 수준으로 주삿바늘은 불가피하지만 내가 가진 진단도구 중에 따뜻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손이 있지 않은가? 내 손은 자타가 공인하는 따뜻한 손이다.
수술이 끝나고 난 뒤 회복한 환자들이 집도의 교수님들이 회진할 때는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그분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수술실에서는 혈관 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교수님들이 회진할 때는 단 몇 분도 환자들의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는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정말 바쁘시니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취된 상태에서 발휘한 그 노력이 정작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손을 잡아드리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환자들이 만족해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힘없이 허공으로 올라왔다가 허망하게 내려가는 환자들의 손을 많이 보았다. 교수님들이 방을 나갈 때 꽁무니에서 따라 나가면서 주제넘게시리 잠시라도 그분들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아 드리고 나온다. 내가 주치의가 되면 나는 그 손들을 매일같이 잡아 주어야겠다.
류마티스 명의 중 한 분은 똑같은 약을 쓰지만 환자들의 반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비결은 몇 달씩 예약하고 기다려서 의사를 만나는 환자분들의 손을 꼭 잡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환자의 손을 잡는 것은 손가락 관절이 굳어지는 구축이나 염증으로 인한 열감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되겠지만 그렇게 손을 잡고 환자를 쳐다보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는 속에는 그 이상의 어떤 따스함이 환자에게 전해지리라 생각한다.
의사에게서 손은 또 하나의 진단도구로서 그리고 환자에 대한 의사의 열정과 사랑을 전하는 좋은 도구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번 할아버지의 손을 매만지며 따스함을 전해 본다.
(추신) 최근 통증 환자를 진료할 때 환자분들이 MRI사진을 가져와서 보여주면서 “대학병원에서 MRI까지 찍었는데 별로 심하지 않대요. 그래서 한 달 치 약을 먹고 동네에서 물리치료받고 조금씩 운동을 하라고 해요.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꼼짝 만 해도 아프고 힘들죠?” 하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아픈 부위를 의사가 꼼꼼하게 만져보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디스크가 터져서 신경을 누르거나 인대가 두꺼워져 척추뼈 주변으로 신경이 내려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경우라면 MRI로 쉽게 확인이 된다. 그러나 그런 환자는 실제로는 드물고 설사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MRI로 보이는 것과 환자의 증상이 일치하지 않는 때도 많다. MRI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는데 참고하는 도구이고 정말 수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수술 여부를 결정하거나 수술 부위를 확정하는데 중요한 검사이다. 그러나 허리나 목이 아프고 팔다리가 저린다고 무조건 MRI를 찍고 MRI로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찜질하거나 간단한 물리치료, 약으로 조절하라고 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상당수의 환자들은 근육이 짧아지거나 약해져서 문제가 발생하고 인대가 약해지면서 관절이 불안정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의사가 환자의 아픈 부위를 직접 만져보고 움직여 보아야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근육이나 인대가 찢어졌다면 MRI에 나오겠지만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지거나 인대가 약해진 것은 MRI로는 확인이 불가능한 것이다. 손으로 만져봐야 알 것을 만져보지 않고 그렇게 비싼 검사만 자꾸 하는 것은 정말 속상한 일이다. (물론 의사 개인 만의 문제는 아니고 우리나라 의료체계 전반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여기서 더 깊이 얘기하지는 않겠다.)
며칠 전에도 흉곽출구 증후군(목 주변 근육의 긴장으로 팔이 저리고 손이 붓는 병)으로 내원하신 분이 있는데 몇 달 동안 종합병원과 대학병원을 오가면서 MRI 뿐 아니라 근전도 검사, 혈액검사까지 온갖 검사를 다 했는데 확진을 못하고 그동안 그냥 약만 먹으면서 버텼다면서 푸념하셨다. 침대에 눕게 하고 고개를 돌려서 몇 가지 근육을 테스트하고 만져보니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만져 보기만 해도 알 것을 그렇게 고생을 한 것이 너무 속상했다.
의사의 손은 제 아무리 비싼 검사기계라 해도 따라올 수 없는 마력이 있고 환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매력과 마력이 있다. 손도 써보지 않고 차가운 기계 위에 환자를 눕히는 것은 너무 미안한 일이다.
내가 지금 환자를 보면서 아픈 곳을 일단 만져보고 움직여 보고 환자의 불편한 부분을 세심하게 체크하는 재활의학과 의사가 된 것은 어쩌면 의대생 시절 신경외과 중환자실을 돌면서 깨닫게 된 가장 좋은 진단도구-손을 쓰는 법을 익혀서 인지도 모른다.
혹여나 의사가 자신의 따스한 손을 쓰지 않고 차가운 기계에만 의존한다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의사는 그 자리를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내어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