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시거나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의 '라쇼몽'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책이 아니더라도 구로사와 아키라 선생의 동명의 제목인 '라쇼몽'이라는 영화도 엄청 유명하니, 책이나 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고전이지요.
저는 소설보단 영화 라쇼몽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만, 그렇다고 아쿠타가와 선생의 글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예전엔 선생의 글이 좀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이번에 이 단편들을 다시 읽으면서 아쿠타가와 선생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느꼈거든요.
선생의 삶이 꽤나 우울했던 탓에 작품들도 대개 우울해서 읽는 동안 축축 처지는 느낌이 없지나마 있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오래간만에 '다음 이야기는 뭘까?' 하면서 두근거리면서 읽은 책이었거든요.
표제작인 '라쇼몽'이나 영화 라쇼몽의 실질적인 원작인 '덤불 속'은 다음에 영화 '라쇼몽'으로 소개해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라쇼몽이 수록된 단편집의 한 작품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바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난징(남경)의 그리스도'입니다.
작품 속 주인공은 난징에 사는 10대 소녀 '송금화'이고 그녀를 '작중 화자'가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금화는 독실한 그리스도인, 정확하게는 가톨릭 신자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직업은 매춘부입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녀가 매춘일을 하는 것은 자신과 늙은 아버지를 부양할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특히 작중 화자는 '그런 일을 하면서 나중에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냐'라고 비아냥대지만 그녀는 하느님이 자신을 이해하실 거라고 믿고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금화는 매독에 걸립니다. 주변 동료들은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하면 너의 매독이 상대방에게 옮겨가서 낫는다"라고 하지만, 그녀는 남에게 옮기면서까지 매독을 치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옳지 못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찾아오지만 그녀는 자신이 매독에 걸렸다고 이야기하고, 남자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대신 손님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면서 푼돈을 벌어 생활하게 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손님이 찾아오게 됩니다. 금화는 남자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언젠가 한 번 만났던 사람처럼 남자가 친숙했지요.
남자는 화대비로 2달러를 주겠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거절합니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튕긴다고 생각했는지, 점차 화대비를 올려 결국엔 10달러까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
송금화는 그 제안 역시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벽에 걸어둔 십자가가 떨어지고, 왜 자신이 남자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는지 알게 됩니다. 남자의 모습은 예수의 얼굴과 비슷해 보였거든요.
그 순간 금화는 남자를 예수라고 생각하고,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침을 하게 되지요. 동침이 끝나고 그녀는 꿈속에서 예수를 만나고, 예수가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하는 순간 잠에서 깨게 됩니다.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질러진 자신의 방을 보고는 어젯밤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자가 주겠다는 10달러는 없었지만 금화는 예수를 만났다고 생각하기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요.
금화의 몸은 낫게 되고 그녀는 더욱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작중 화자가 시간이 지나 다시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화자는 금화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그날 밤 금화를 찾아온 외국인 손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가 아니라 그녀의 몸만을 탐한 못된 남자였고, 그 이후 매독에 걸려 죽었지요. 화자는 그녀에게 이 사실을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묻습니다. "그날 이후로 정말 아프지 않았냐"라고. 그러자 금화는 주저 없이 "네, 전혀."라고 대답하고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소설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앞서 짧게 언급했던 두 작품, 라쇼몽과 덤불 속 이야기를 짧게 해 볼까 합니다.
단편집에서는 라쇼몽-난징의 그리스도-덤불 속 순서대로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덤불 속 - 라쇼몽 - 난징의 그리스도 순서대로 읽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덤불 속 이야기를 해보죠. 사건은 한 남자가 산길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며 시작됩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남자의 아내, 남자를 죽인 다 조마루라는 도적, 무당의 몸을 빌려 증언하는 죽은 남자와 사건 현장을 처음으로 발견한 나무꾼. 이 네 명의 증언을 다룬 짧은 단편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네 명의 증언이 묘하게 같은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죠. 네 명은 같은 사건을 두고 각자에게 유리한 증언만 합니다. 뉘앙스로 볼 땐 죽는 남자의 증언이 사실인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확실하지 않지요. 죽은 남자 역시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알지 못하게 애매모호하게 소설이 끝이 나지요.
이번엔 라쇼몽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하인이었던 남자가 '라쇼몽(나생문,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 정도 되는 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일하던 저택에서 쫓겨난 남자는 이제 뭘 해야 할지 고민을 합니다. 그러던 중, 한 노파를 만나죠. 노파는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발을 만들어 판다고 합니다.
남자는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고 노파에게 이야기하지만, 노파는 "이 여자는 살아있었을 때 뱀고기를 물고기로 속여서 팔았고,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것이니 나는 죄가 없다."는 황당한 변호를 하지요. 그러자 남자는 "그럼 내가 당신의 옷을 빼앗는 것도 아무 죄가 없겠군."이라며 노파에게 옷을 내놓고 꺼지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소설의 끝이지요.
'덤불 속'에서는 "우리는 자신의 명예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라쇼몽'을 통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선한 마음을 가져선 안된다. 그 세상에 걸맞은 악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아쿠타가와 선생은 이 단편집 속에서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난징의 그리스도,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작품 속 이야기의 설정이 그리스도교를 부정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읽고 "신은 없으며 그녀가 구원받은 것은 양심을 여태 지켜온 보답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읽고 "그녀의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구원을 내려준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일깨워주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끔찍한 삶 속에서 신앙과 양심을 지키고 사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서 마치 진흙 속에서 연꽃과 같은, 신앙 혹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감상이 틀리지 않고, 그렇기에 맞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덤불 속'에서의 이야기처럼 인간은 자신의 시선으로만 타인 혹은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모두의 생각과 느낀 점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예시도 든 감상 중에서 마지막 것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만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덤불 속의 세상과, 서로를 뺏고 뺏는 지옥 같은 라쇼몽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고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죠.
송금화는 선한 사람이었고 그녀를 찾아온 남자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느님은 무조건 적으로 금화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무뢰한에게는 징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송금화와 무뢰한 두 명에게 구원, 혹은 면벌을 받을 기회를 공평하게 주었습니다.
무뢰한이 화대비를 올릴 때마다 금화의 신앙과 양심은 인정받게 되고, 무뢰한에게 주어진 면벌의 기회는 점점 줄어듭니다. 마침내 10달러까지 화대비가 올랐을 때 금화는 구원을, 무뢰한은 여태 살아온 방탕함의 벌을 받게 됩니다. 그 순간 금화가 고이 모셔두었던 십자가가 떨어지며 그녀의 눈에 하느님이 들어오게 된 것이죠.
혹시 누군가가 저에게 "결국 그 남자는 예수가 아니었고 송금화의 몸을 탐한 나쁜 남자가 아니냐, 그럼 금화가 느끼고 있는 신앙도 인간의 착각에서 나온 오해 같은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전 "그 것들은 이 단편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떤 모습의 구원을 가지는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구원이 어떤 모습을 가졌건 '그것이 자신의 구원임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죠.
그리고 그 구원을 알아보기 위해선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바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송금화는 선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직업이 어땠건 간에 언젠간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혹은 그녀에게 찾아올 구원이 그녀에게 마지막 시험을 내려주었을 때도 그녀는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평소에 받는 화대비의 5배가 넘는 돈의 유혹을 이겨낸 그 순간 십자가가 떨어지면서 그녀에게 구원을 찾아왔고, 이윽고 그녀의 병은 낫고 더욱더 독실한 신앙마저 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들(덤불 속)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런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쇼몽)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양심과 신앙을 지키고 산다면, 언젠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금화가 자신의 구원을 찾는 과정이, 그리고 그렇게 찾은 구원이 남들이 볼 땐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그녀는 그 기적과 같은 밤의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행복하게, 그리고 양심껏 살아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