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을 아쉬워하지 말라, 돌고도는 삶의 원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테니
이제 완연한 가을이 왔습니다. 부쩍 날씨도 추워지고, 해도 짧아지는 것 같네요. 단풍과 낙엽이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계절이 왔습니다. '가을 탄다'라는 말처럼 저도 가을이 되면 뭔가 감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단풍이 거리와 풍경만 물들이는 게 아니라 제 마음 역시 센치한 파란색으로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뭐랄까, 가을이 오면 느껴지는 많은 것들.
변해버린 거리와, 또 변해버린 온도까지. 밤을 걷다가 겨울 냄새라고 할까요, 차가운 기운이 코 안으로 들어오고 눈으로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눈에 들어오면 굉장히 감성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올 한 해는 어땠나, 내년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올 한 해는 참 빨리 지나간 것 같고, 또 그러다 보면 삶이라는 게 참 부질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곤 하고요.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노래를 듣든, 뭔가 제 감수성을 건드리는 것들을 찾아보게 되는 계절입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도 마찬가지이죠.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자극적인 내용이 전혀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겐 소개하기가 애매한 영화이긴 합니다만, 이곳인 개인적인 공간이니 한 번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영화의 제목은 '다시 태어나도 우리', 린포체라고 불리는 '앙뚜'라는 소년과 그 소년의 스승인 '우르간'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작품이죠.
앙뚜는 '린포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린포체는 '보물'이라는 뜻으로 주로 불교에서 환생한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그는 전생에 티벳의 캄이라는 곳의 한 사원에서 유명했던 고승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린포체가 라다크에 찾아와 앙뚜가 자신과 수학을 하던 스님이 맞고, 그는 진짜 린포체가 맞다고 공인을 하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앙뚜, 린포체에 대한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진짜 린포체라면 그가 있던 사원에서 제자들이 앙뚜를 데려가야 하는데 그의 제자들은 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바로 중국의 티베트 탄압 정책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대놓고 린포체를 무시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어린 앙뚜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인 우르간과 함께 티베트 캄으로 향하는 여정을 하게 되지요.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고, 좋게 이야기하면 담백합니다. 별 다른 사건도 없고 영화의 시선은 린포체와 그의 스승인 우르간을 보여줄 뿐이니까요. 하지만 너무나도 순수한 둘의 모습을 보다 보면, 특히 우르간의 눈빛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부처가 실존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한 모습을 보여주지요.
부족하고 척박한 곳이지만 행복해보이는 둘의 모습 속에서 일상의 소중함, 또는 삶과 행복의 본질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제 감정을 건드리는 묘한 부분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불교의 중요 교리 중 하나인 '윤회'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영화 내에서 사람이 죽으면 다시 환생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불교를 비롯한 힌디계 종교에선 이러한 윤회사상을 가지고 있지요. 죽고나서 전생의 업을 저울질해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동물로 태어나거나 혹은 무생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많은 선을 쌓으면 윤회라는 고통에서 벗어나 비로소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둘은 몇 천 킬로가 넘는 거리를 걷고 걸어서 결국 티베트의 국경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방해로 인해 티베트로 건너가지 못하고, 린포체와 우르간은 캄을 가로막고 있는 겨울 산에 올라 제자를 찾는 나팔을 불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근처 사원에서 린포체는 제대로된 교육을 받기위해 남으면서 우르간과 헤어지게 되죠.
스승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린포체, 그런 린포체를 달래기 위해 우르간은 눈싸움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봄이 왔기에 눈은 이미 녹아 없어졌고 그들이 서있는 곳은 흙밭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은 상상의 눈을 만들어 눈싸움을 하고, 결국 우르간이 먼저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시작되며 영화가 끝이 나지요.
"15년 후에는 제가 공부를 다 마쳤겠죠."
"그땐 저는 너무 늙어서 어린아이처럼 되어 있을 텐데요."
"스승님은 제가 모실 겁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해지네요."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기독교에선 윤회를 통한 환생이라는 건 없습니다. 비슷한 개념인 부활은 오직 예수만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죽으면 전생의 업에 따라 지옥이나 연옥, 혹은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지요.
기독교에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선과 같습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앞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하나의 직선이지요. 불교는 조금 달라서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된 원과 같습니다.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끝없이 되풀이되며 순환하는 하나의 원형입니다.
앙뚜가 정말 15년 동안의 공부를 마친 후 그가 티베트로 갈 수 있을지, 그냥 스님이 되어 라다크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또 그가 라다크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우르간이 살아 있을지, 이미 고인이 되었는지 역시 알 수가 없죠.
만약 앙뚜가 라다크로 돌아온다면 그곳에서 앙뚜는 우르간을 찾게 되겠지요. 아직 살아계실 수도, 아니면 돌아가셨을진 모르지만 어쨌든 앙뚜는 그곳에서 우르간을 찾을 겁니다.
살아계시다면 그를 옆에서 돌볼 테고 돌아가셨다면 그의 환생자를 찾아 환생한 우르간의 스승이 되어주겠지요. 최악의 경우 앙뚜가 우르간을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앙뚜는 그에게 받은 사랑과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이 특히나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그들은 헤어졌음에도 언젠가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있어 삶은 직선이 아닌 돌고 도는 원과 같은 형태이므로.
우리네 삶도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가을이 유난히 감성적인 계절인 이유는 땅바닥을 수놓은 형형색색의 낙엽도 한몫을 톡톡히 거들지요.
낙엽은 생명을 잃은 죽은 잎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단순한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내년의 파릇함을 위한 준비 혹은 희생에 가깝죠. 낙엽은 땅에서 삭으면서 다시 뿌리로 흡수되어 나무의 일부가 될 것이고, 그 안에서 내년 봄에 푸른 잎을 피워내기 위해서 추운 겨울을 기다리겠죠. 그리고 봄이 되면 다시 푸르른 잎으로 돋아나겠지요. 마치 윤회처럼요.
이렇듯 윤회라는 삶과 죽음의 순환, 그리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관계가 역전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교적 세계관이 아름답고도 예쁘게 그려진 영화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걸 내려놓는 가을이 지나면 곧 겨울이 찾아오겠지요. 겨울 나름대로의 향취가 있지만, 그래도 삭막한 계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앙뚜 역시 스승 우르간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수련이라는 긴 겨울을 잘 이겨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꼭 훌륭한 스님이 되어서 우리와도 다시 만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