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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말킴 Nov 21. 2019

우붓 한 달 마무리, 그리고 요가

인생은 요가처럼

    우붓에서의 한 달이 끝나다


    첫 여행지인 우붓에서의 한 달도 끝났습니다. 설렘과 기대를 한가득 안고 날아온 이 곳. 절대 짧지 않을 것 같았던 한 달도 다 지난 지금에서 돌아보니 너무 짧게 느껴지네요. 그래도 우붓 골목을 내 동네처럼 누비던 그 기분은 다른 여행 때와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골목골목, 집집마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사원들 그리고 펜조르(penjor, 발리의 명절인 Galungan Day에 집 앞에 꾸며놓은 대나무로 만든 장식물로, 부와 안전을 가져다주길 기원한다고 합니다), 뭐 하나 이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골목만 누벼도 힐링되는 곳이었어요.


    우붓 한 달 살기의 목적은 코딩 공부와 요가,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중 요가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았어요.




    축구를 사랑하는 나에게, 요가란?


    저는 어릴 때부터 거의 모든 운동을 좋아했어요. 공놀이는 가리지 않고 했고, 2002년 월드컵의 추억 덕분인지, 축구를 가장 좋아합니다. 하지만 제가 싫어하는 운동도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헬스나 요가 같은 정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운동의 기준을 생각해보면, 경쟁적인 운동이냐 아니냐로 나뉘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축구는 공 하나를 두고 성인 22명이 미치는 게임이라고 한 걸 들은 게 갑자기 떠오르네요. 어릴 때부터 이기는 걸 좋아하고 어쩔 때는 꼭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어요. 성인이 되고서는 굳이 이기지 않아도 그 순간을 즐겁게 즐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점수를 매기고 결과가 나와야 운동 좀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요가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만 없는 게 아니라 질 수도 없습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나를 지루하게 하는지. 운동을 하면서도 운동을 한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요가는 운동이 아니라 명상인가?)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요가를 하고 나서 개운한 표정으로 돌아가더라고요. 그런데 우붓에서 요가를 하면서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습니다. 끈질기게 요가를 하자고 설득한 제 아내와 우붓의 요가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우붓의 요가 고수들, 그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우붓은 요가로 유명합니다. 정말 좋은 요가 하우스가 많고, 좋은 선생님들이 많아요. 초록 초록한 정글 숲을 배경으로 새소리를 들으며 요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요기(Yogi, 요가하는 사람)들 덕분에 채식 식당도 많고 요가 용품점들도 거리마다 있어요.


    제가 우붓에서 요가를 할 때마다 선생님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경쟁이 아닙니다.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마세요. 나에게 집중하세요. 내 몸의 움직임과 내 몸의 한계를 느껴보세요. 남들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잘 아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 말은 요가할 때마다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는 데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저는 요가를 내 몸의 유연성을 높이고 다리를 쫙 찢을 수 있도록 나를 단련하는 운동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늘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멀리 팔을 뻗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유연성이 길러질 테니까요. 내 한계 따윈 모르겠고, 선생님이 하는 것처럼 따라 하다 보면, 그렇게 고통을 참고 이겨내면 유연성이 늘겠거니 하면서 스스로를 혹사시켰습니다(뼛속까지 경쟁심으로 가득 찬 한국인입니다). 그러니 관절이나 근육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죠. 제가 요가만 하면 어디가 시큰시큰한 이유입니다.


    요가에서는 호흡과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한 동작을 하기 위해서 천천히 몸을 움직이면서 내 몸 구석구석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느껴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움직임을 지속하다가는 호흡과 자세가 망가지겠다 싶은 그 지점에서, 천천히 다시 호흡을 하면서 내 한계를 느껴봅니다. 아 내 몸은 여기까지 움직이도록 허락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다시 천천히 원래 자세로 돌아옵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내 몸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시 호흡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내 몸과의 소통을 늘려갑니다. 어떨 때는 내 한계 앞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멈춰 야만 하고, 어떨 때는 그 한계를 한번 깨 볼까 하는 나와 몸의 교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때는 한 뼘 더 내디뎌 보는 거죠.


    내 몸과의 교감 없이 손을 더 멀리 뻗으려고 숨을 참고 척추를 있는 힘껏 말아서 한 뼘 더 내디뎠다고 한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엇박자를 내면 무엇 하나는 다치겠죠. 허리 유연성 제로인 제가 발가락 한 번 잡아보겠다고 바들바들 떨면서 온 몸에 힘주고 있을 그때 아마 제 몸은 저에게 엄청난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을 것 겁니다. 뇌에서는 비상 신호를 각 근육과 관절들에게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경쟁이 아닙니다. 남이 아닌 내 몸의 움직임과 나의 한계를 느껴보세요.
   


    우리 인생도 요가처럼


    축구가 더 좋은 운동인지, 요가가 더 좋은 운동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축구는 축구 나름의 의미가 있고, 요가는 요가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골 더 넣기 위해, 상대를 이기기 위해 공 하나를 놓고 달려 나가는 축구도 여전히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운동입니다. 다만 이제는 예전과 다르게 요가도 저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운동이 된 것입니다. 내 한계를 느끼고, 꾸준히 소통하고, 그 한계를 넘을 준비가 되었을 때 한 발 더 내디뎌 보는 것. 축구만 좋아하는 예전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이제는 둘 다 좋아하게 되었어요.


    저의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그저 높은 곳을 향해서만 달려갔어요. 더 높은 곳에 가기 위해서는 잠을 더 줄여야 했고요. 그 시절에 그때만 있었을 주위 사람들과의 추억 쌓기도 미루거나 포기해야 했죠. 내 한계나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가는 게 성공인 것 같은 시기였어요. 그래도 내 한계를 빨리 극복하고 더 높은 곳으로 가는 확실한 원동력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작정 높은 곳만을 바라보지 않아요. 주변을 돌아보면, 무조건 높은 곳에 있다고 좋은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높은 곳이 좋다고 해서 가봤는데 나랑 맞지 않는 곳일 수도 있고요, 나에게 맞는 다른 더 높은 곳이 있는데 하는 후회가 남을 수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나와 맞는 곳을 찾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내가 정말 잘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또 내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잘 이해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다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 그때 비로소 축구를 할 때 나오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순간이지 않을까요.


    인생은 요가처럼, 그리고 때로는 축구처럼. 요가를 할 때처럼 나 자신의 구석구석을 잘 살펴보고, 때로는 축구처럼 열정적으로 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 나가는 그런 인생이면 조금 더 의미가 있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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