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2016년 8월부터 지금까지 약 3년째 해외 장거리 부부를 하고 있다. longdistance relationship/couple을 줄여 편하게 '롱디'라고도 하는데, 남편과 나의 관계의 핵심 키워드가 바로 "롱디"이다. 처음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롱디"가 우리의 메인 테마 중 하나가 될 줄은 몰랐으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해보고자 한다.
2016년 8월 나는 회사 지원을 받아 벨기에 브뤼셀로 유럽 경쟁법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갔고, 남편은 당시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던 중이어서 자연스럽게 다시(?) 롱디를 하게 되었다.(참으로 인생은 앞날을 모르는 것이, 당시 내 유학기간 동안만 한시적인 것일줄 알았던 롱디는 내가 벨기에에 있던 기간에 남편이 홍콩-싱가포르로 옮기면서 내가 한국에 복귀하고 난 지금에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 있던 기간엔 남편이 휴가를 내거나, 회사 본사가 영국/벨기에인지라 출장을 오거나 유럽 학회가 열리면 참석차 유럽을 방문할 일이 있어, 겸사겸사 여행을 함께 하며 두세달만에 한번씩 얼굴을 보았다.
2017년 2월, 브뤼셀-로마-부다페스트를 거쳐 본사가 있는 런던 근교 Brentford에서 우리의 2주간 여행을 마무리하던날들의 기록이다.
Brentford, UK, photo by mjk
#1
우리 여행의 마지막은 본사 business meeting이 예정된 런던 근교의 Brentford에서 마무리 되었다. 사실 남편은 학회나 출장 기간에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실제 여행은 부다페스트에서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하루 정도만 머물다가 브뤼셀로 곧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Brentford는 히드로 공항 바로 옆, 런던 city center에선 차로 45분 정도 떨어진 근교 도시다. 무언가를 보거나 돌아다닐 여력이 없었던 나는 작은 이 도시에 "그냥 있기"로 했다.
트립어드바이저에 혹시나 뭐가 있나 찾아보았지만 낫띵, 호텔 사이트에서 조차도 attractions에 공원 하나만 딸랑 나올만큼 아무것도 없는 촌동네(로 보)였다. 오후 느지막히 단 하나 뿐인 그 공원(Syon park)으로 걸어 나왔는데 공원엔 말목장으로 쓰이는 것 같은 너른 초지와 새소리, 푸른 하늘, 간간히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엄마들과 아이들,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 행인 몇 이 드문드문 지나갈 뿐인 고요한 곳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래간만에 모든 소음으로부터 (데이터도 없던터라, 인터넷 음악 다 없음;) 차단된, 적막하지만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남편과는 다음에 또 언제 만나게 될지, 몇 달 뒤가 될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물리적으로 몇 달을 같이 지낸 것 이상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그 날 Syon park에서의 혼자 보낸 오후는 마치 예비 된 것 같은 여백의 시간이었다.
함께 함이 좋았던 시간의 끝에 맞이한, 혼자로 돌아가는 시간
Syon park, Brentford, UK. Photo by mjk
Syon park, Brentford, UK. Photo by mjk
#2
우리는 떨어져 지내면서, 대화가 더 많아졌다
서울에서는 각자 바쁘게 사느라- 출근 패턴도 달라 남편은 일찍 나는 밤늦게 들어왔고 주중엔 대화할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많진 않았다. 주말은 항상 쏜살같이 지나갔다.
브뤼셀에선 남편이 퇴근하고 나서 자기 전에 내가 오후라 긴 통화를 하고, 내가 잘 때 쯤 남편이 일어날 시간이라서 전화로 깨우면서, 거의 한 시간 이상 씩 매일 영상 통화를 한다
우리가 과연 떨어져 살고 있나 싶을 정도로 더 많이 대화하고, 소소한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공유한다
Brentford 에서의 마지막 밤, 미팅에서 돌아온 남편과 침대에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 일 이야기를 남편에게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울 남편은 사실 내 일의 detail엔 관심 없음 ㅋㅋ), 나는 남편의 회사나 업무 이야기를 detail하게 듣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편이다.
초창기부터 공유한 덕분에, 지금은 정보가 outdated 되긴 했으나, 초기엔 HIV 신약 관련 자사제품인 트리맥의 장단점, 한국 의료보험 시스템 하에서의 마케팅 포인트, 경쟁사 약의 장단점, 향후 HIV치료제의 방향(경구제에서 주사 타입 신약 개발 중이라 함)과 아시아 시장별 특징까지 나름 꿰고 있었다...(!!)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남편과 대화할 거리가 늘어나고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제약 분야 자체에도 경쟁법 이슈가 많아 배경지식이 있는터라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점의 차이를 나누는 대화도 즐거웠다.
예를들면, 본사 미팅에서 앤드류 위티 회장 스피치를 듣고 온 남편과 같이 회장이 제시한 비젼에 대한 비평, 더불어 조직에 대한 견해 차이.
미국에서 공부한 남편은 LOC 입장에서 UK based firm(유럽이 본사인 회사)는 좀 비효율적인거 같다는 우려를 전했다. 나는 다른 차원에서 업무절차의 비효율성 자체는 문제겠지만- 고용 보장이 철저한 유럽회사들이 좀 더 인간적인거 같다고, 조금 비효율적이라도 (망할 정도가 아니라면) 많은 이들이 일자리와 직장을 가지고 가족을 부양하며 삶을 다같이 이어가는 고만고만한 세상도 나쁘지 않은 거 같다고.
어차피 (해고/구조조정을 통한) 영업이익률이 높아져도 임직원들 월급이나 근로조건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주주배당이 늘어나거나 최고위층 임원의 성과급만 늘어나는 구조라면, 다른 제약회사 보다 고용률이 높아 영업이익률이 떨어지는 GSK가 인간적이라서 그건 착한 비효율성 (물론 의도된 건 아닐 수 있지만) 아닐까..란 관점의 공유.
(참고로, 미국base 제약회사인 화이저, 길리어드 등은 GSK 절반 이하의 고용으로 두 배 이상의 매출을 한다고 함/ 물론, 제약회사의 경우 R&D투자비용 대비 신약 개발 성공률이 이익률에 더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일 수도 있음)
아, 그리고 남편은 신임 ceo가 인사를 했는데 그녀가 아주 카리스마 있고 매력적이었으며 40대 초중반의 여성인데- 아이가 4명이라 그 남편은 가사를 전담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녀의 남편처럼 되는게 본인의 UK드림?!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사항을 내게 넌지시 전달하기도 했다..ㅋ
그날 밤 나도 오래간만에 사무실 소식을 들었다. 올해 펌에서 7명의 파트너 변호사가 생겼고, 그 중 4명이 여성이다. 좋아하는 선배 변호사님들이 파트너가 되어 더욱 기쁘다 ( 대/내외적으로 여전히 많은 레이어와 유리천장이 존재하지만, 작년부터 대외적으로 여성 파트너의 수가 매년 수명씩 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서로의 세상이 겹쳐지고, 생각이 교차되는 마지막 날 밤이었다.
Syon park, Brentford, UK. Photo by mjk
#3
요즘은 큰 욕심이 없다 물론,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어 자족하는 마음이 쉽게 들어서 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건강히 살아있고 눈을 떠 일상을 보낼 수 있음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법륜스님 즉문즉설을 듣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철학이 있는데, 우리는 모두 들풀 같은 존재라는 거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자신의 어딘가 특별해야 한다(또는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고 내 인생은 남들과 다르고 특별하길 소망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온다는 것이다. 들풀이라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존재 자체로 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들풀과 존재의 가치가 다르다는 생각은 괴로움을 낳는다. 요즘 내가 들풀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조금 이해가 가서 그런지, 평안하다.
나는 들풀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고 일상의 즐거움과 슬픔과 좌절과 후회를 모두 감사하면서 살고 싶다.
무엇보다 요즘은 항상, 이런 감사의 바로 뒷면에 "죽음"을 인식하게 된 내가 있음을 깨달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별한다.
완벽할 것 같은 여행이었는데, 런던으로 넘어온 날 우리답지 않은 실수가 있었다. 내가 없으면 쇼핑을 하지 않는 남편을 위해 면세점에서 꽤나 좋은 양복 한 벌을 사줬다. 쇼핑은 안 좋아하지만 취향이 분명하고 까다로운 남편이 맘에 들어한 수트 였다.
우리가 내렸던 공항은 stansted airport로 런던 북부 근교 공항이고 centert까지 한 시간, 그리고 본사는 다시 center에서 남서쪽을 한 시간 내려가는 brentford에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 한 시간 연착되고 비가 내린 런던 저녁에 빨리 호텔로 가고 싶은 바람에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내린 우리는 다시 한 시간을 넘게 달려 호텔에 오고 나서야.!! 아침에 산 양복을 버스에 놓고 내린 걸 알았다.
바로 공항 분실물센터와 버스회사에 전화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밤 11시에 다시 한 시간을 걸려 king's cross역에 가서 해당 버스 회사 사람을 직접 만나 수소문을 했지만, 우리가 탔던 버스에서 분실물은 없었다는 답변만 받았다. 그 다음날에도 양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잠자리에 들며, 결국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순간 너무 슬픈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나 : 아, 아깝긴 하지만 슬플 것 까진 없지 않아~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경제적 손실로 끝나는 일은 어쩌면 가장 다행인 불행이지!
남편: 아니 아니, 양복이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언젠가 당신이 또는 내가 당신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날도 올 꺼 아니야.... 그리고 우린 그게 언제인지 모르게- 마치 오늘 갑자기 잃어버린 한번도 입지 못한 비싼 양복처럼- 이별은 갑자기 찾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슬펐어.
순간 가슴이 묵직해졌다
평생을 함께 할 꺼라 믿으며 살아가는 나의 모든 관계들, 부모님, 배우자. 자녀 친구들과 지인들, 우린 모두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한다
#4
추상적이던 이별이 구체적 슬픔으로 다가온 건 사실 작년 초 엄마가 암3기로 긴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 이후 삶의 가치관은 그 전과는 본질이 달라졌다. 오늘 내게 주어진 건강한 하루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구나.
여전히 신(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만, 우린 결국 일주일이든 일 년이든 몇십 년이든 왔다 가는 들풀 이고 언젠가 바람에 날라가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땅에서는 사라질 존재라는 것, 가슴에 절절히 박혔다.
일상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다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더 소중해졌고, 사회의 인정이나 이목은 덜 중요해졌고, 나를 입증해내거나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욕심은 내려갔다. 겉으로는 달라 진게 없을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의 결은 달라졌다.
엄마는 다행히 올 겨울 항암치료를 잘 마치셨고, 이젠 머리카락도 많이 나셨고, 기력도 점차 회복하셨다. 하지만 모두들 우리에게 각자가 허락된 시간이 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 건강해 보였던 누군가와의 이별이 벼락같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진심으로 더 많이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
오늘 하루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고 미래의 노예가 되는 것만큼,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모든 이와의 관계에서 허망한 것은 없을 테니...마음 결의 아주 작은 변화, 아주 작은 평안과 두려움, 그리고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매일 함께 지내고 있다.
참고로, 이래저래 은근히 욕심쟁이인 나와 달리 우리 남편은 참으로 큰 욕심도 야망도 없는 해맑은 사람인데 (5년 같이 살아봤는데, 순수 인증해드림ㅋ), 그래서 나는 종종 남편이 신기했다. 그러면 하는 대답이 있다.
“난 덤으로 사는 인생이야”.
언제부터?
"태어났을 때부터"
남편은 태어나자마자 심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당시 레지던트였던 아버님이 다행히 이상한 점을 빨리 알아차려 생후 몇 주 만에 수술을 했다고 한다. 당시 해당 수술이 시행된 가장 최연소(라고 하기엔 거의 신생아)였다고 한다. 지금은 건장한 남편이지만 여전히 가슴 한가운데 일자로 심장을 열었던 수술 자국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 그래서 덤으로 사는 인생임을 쉽게 잊을 수 없나 보다.
#5
각자 일상으로의 복귀, 이제 수 개월 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혼자 그리고 함께 :) 인연을 맺는 모든 이에게 감사와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