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분한 책상이 오늘따라 심난하다. 정리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세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란 게 있는 법. 머지 않아 똑같이 심난해질 도루묵 장면을 떠올리니 괜히 힘 빼기 싫어진다.
문구류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한번도 쓰지 못하고 버린 것들도 꽤 있다. 아끼다가 똥 된 것이다. 주로 값비싸거나 희소가치가 있는 그래서 손때라도 묻을까 힘주어 쥐어보지도 못했던, 한 마디로 애지중지했던 것들이다. 그것들을 나는 서랍 속에서 곱게 잠 재우다가 결국 영면의 길로 떠나보내곤 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소심한 성격이 만든 습성은 좀체로 바뀌질 않았다.
외국에 자주 나가셨던 아빠는 어린 자식들을 위해 선물을 가득 사오곤 했다. 안녕히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서둘러 끝내고 우리는 아빠의 캐리어 주변에 득달같이 들러붙었다. 우리가 궁금한 건 아빠의 귀환이 아니라 선물의 안녕이었다. 제일 인기 있었던 건 일제 문구류였다. 딸들은 일제 필통이며 연필, 손수건따위에 환장을 했다. 귀여운 캐릭터는 물론이고 선명한 칼라와 오밀조밀한 디자인은 정말이지 눈부실 만큼 훌륭했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연필은, 이쑤시개만큼 가늘고 젓가락처럼 긴 것이었는데 꼭대기에 인형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연필을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꾹 참고 보관만 했다. 가끔 서랍에서 꺼내서 빙글빙글 돌려보거나 감촉을 느끼거나 냄새를 맡아보는 걸로 쓰고픈 욕구를 참았다. 그토록 훌륭한 연필을 심지어 깎아 쓴다는 건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짓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떄의 나는 기껏 초등학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번 깎아서 써볼까?'하는 욕망에 시달렸다. 어떻게든 연필을 지켜내기 위해 나는 명분을 하나 만들었다. '나중에 딸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물려줄 거야.'
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던 해에 나는 그 연필을 아이에게 넘겨 주었다. 할아버지가 사오신 선물이었고, 엄마가 초등학생때부터 간직해온 귀한 연필이란 설명도 잊지 않았다. 아이는 당장에 그걸 깎아달라했고 칼로 깎아주자 공책에다 그림을 그렸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연필심은 곯지도 않았고 진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감격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내가 그토록 소중히 간직했던 것이 아이의 손에 쥐어지는 감동이라니! 그러나 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어느새 아이는 연필에 흥미를 잃었다. 연필은 거실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이는 티비에 집중할 뿐이었다. 여기저기굴러다니던 연필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건, 다름아닌 개집이었다. 강아지가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진 인형은 연필 끝에 간신히 매달려 대롱거렸다. 마치 내 인생을 향해 메롱 메롱 엿먹이는 모습으로.
문구류를 좋아하는 건 여전해서 책상이고 서랍이고 또는 필통이고 간에 그 속에는 각양각색의 문구류로 가득하다. 남편은 그것을 볼 때마다, "어차피 살아서는 다 못 쓸테니 죽으면 관 속에 넣어주겠다!"며 협박인지 약속인지 의도를 알 수 없는 호언장담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는 펜을(다 쓴 것조차)잘 버리지 못한다. 좋은 펜을 보면 가슴이 셀레고 귀여운 캐릭터 문구 앞에선 오금이 저리다. 그래도 아껴서 똥 만드는 짓만은 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단 걸 알아버렸다. 펜으로 치자면 잉크가 마르지 않았을 때, 사랑으로 치자면 눈과 눈이 만나 수만 볼트의 빛이 터지는 때. 가장 빛날 때 뭐든 해야한다. 그것이 비록 흔해빠진 문구류의 용도일지라도.
그러고보니 필통 정리를 할 때가 됐다. 버릴 것들은 갈무리해서 재활용봉투에 넣어야겠다. 잘 버리는 것이 잘 정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허긴, 인생이란 게 그런 거 아니던가. 버릴 것은 버리고 살 것은 사들이는 것. 조만간 문구점에 들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