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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미 Feb 04. 2020

조르바처럼 살아볼 걸 그랬지..

 오래전, 귀농을 꿈꿨던 시절이 있었다. 시골 가서 살자고 남편을 죽어라 졸랐다. 아이들도 시골에서 키우고 싶었고 나부터 도시가 싫었다. 하지만 남편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보람을 찾고 싶어 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 몰래 시골 여기저기를 혼자 돌아다니며 빈집을 보러 다녔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 경상북도 문경의 한 작은 마을이었다.

10년도 훨씬 지났지만 그곳은 어제 본 듯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큰 호두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정령처럼 곳곳에 우람하게 서있었고 품이 넓은 하천이 마을 옆으로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너무 높지도 그렇다고 너무 낮지도 않은 산들이 마을을 가슴에다 포옥 품어 안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첫눈에 반해 버렸고 망설임 따윈 없었다. 여기서 살아야 되겠다고,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마음속에다 말뚝을 박아버렸다. 그때 내 상황이 벼랑 끝에 몰린 한 마리 어미 양의 심정과도 같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몸에 녹이 슨 것 같았다. 삐걱거리는 관절로 마치 물속을 걸어 다니듯 두 발을 질질 끌고 다니며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일주일에 반은 출장으로 집을 비웠고 나머지 반은 퇴근 시간조차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에너자이저 아들 둘은 눈만 뜨면 메추리처럼 정신없이 우르르 뛰어다니는 통에 층간 소음으로 인한 죄인이 되어 아랫집 아줌마를 피해 다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타임루프처럼 되풀이되고 있었다.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죽을 것 같았으니까. 어쩌다 주어지는 짧은 휴식 시간(아이들 둘이 한꺼번에 낮잠을 자게 됐을 때)을 이용해 도망갈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귀농사모(귀농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인터넷 카페였다. 문경을 알게 된 것도 이곳을 통해서였고 마침 빈 집이 있다는 이장님의 연락을 받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연락을 준 이장님은 2년 전 교사생활을 접고 이곳 문경에 내려와 농사도 짓고 작은 대안학교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 마다 틈틈이 손수 집을 지었고 이제 거의 다 지어졌다고 했다. 때문에 처음 시골에 내려와 여기저기 손보며 고쳐 쓰던 집을 나에게 그냥 공으로 내어주시겠다는 거였다. 창호지 문이 덜컹거리고 마당에는 풀이 내 키만큼 자라있고 한쪽에는 다 무너져가는 축사가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있는 그런 시골 빈 집을 생각하고 내려갔다. 하지만 이장님이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내어주겠다는 그 집은 지금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와 살아도 아무 불편함이 없을 그런 집이었다. 기가 찰 만큼 고맙고 너무 좋아서 폴짝폴짝 뛰면서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들하고 나는 먼저 내려가 있을게. 당신은 나중에 와도 돼.”


하지만 남편은 나의 희망을 단칼에 싹둑 잘라버렸다.


“철없는 소리 그만해. 귀농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그때 나는 너무 서럽고 절망스러워 3박4일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었다. 계속 울다보면 남편이 져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난감을 사내라고 마트 바닥을 굴러다니며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울었고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온 노인네처럼 청승스럽게 울었다. 너무 울다보니 흐물거리는 동태 눈알처럼 앞이 뿌예졌고 시커먼 갯벌의 진흙처럼 마음이 질퍽거렸고 온몸의 뼈마디가 다 어그러진 것처럼 아팠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면 다 괜찮아질 거라 믿고 버티던 희망마저 사라져 버리자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지금 같았으면 남편의 허락 따위 받으려 하지도 않았겠지만 대한민국 정규교육이 미친 부작용 때문인지 그때의 나는 하지 말라는 것은 섣불리 저지르지 못하는 소심하고 나약한 엄마였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
마음먹었을 때 나는 떠나지 못했다. 그때 어떻게든 떠났더라면 어땠을까. 시골살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하지 않아서, 혹은 아이들 교육 문제로나 그곳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다시 도시로 올라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바람대로 행복하게 잘 살았을 지도 모른다. 층간 소음 때문에 아이들에게 매일 악에 바친 소리를 지르고 후회하고,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건전지라도 빼내서 재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도대체 왜 나 혼자만 이렇게 힘들어야 되는 거냐며 울고불고, 밤에는 잠들지 못해 괴롭고 아침에는 눈을 뜨는 게 괴로워서 몸부림치던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쿵쿵 거리며 뛰어놀고, 나는 텃밭에 채소를 키워 된장 하나만 있어도 싱싱한 풋고추와 상추를 따와서 볼이 터져라 쌈을 싸먹고, 달디 단 시골 공기를 맡으며 산책을 하고, 옆집 앞집 할머니와 나물을 다듬으며 수다를 떨고, 불빛 하나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목이 꺾어져라 별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아침에는 가벼운 몸으로 팔랑팔랑 일어나 쌀을 씻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는… 그 시절에는 그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떠나지 못했다. 때문에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일상의 연속 속에서 용기 있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격려 받아 마땅하다. 때론 ‘이기심’에다 내 삶의 방향을 맡겨야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 때문에 내 꿈을 포기했노라고 평생 남의 탓이나 하며 사는 것보단 그 편이 훨씬 낫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정수리에서 발뒤꿈치까지 내 감정에 충실해 ‘그 순간’을 온전히 살아보는 것도 멋있는 삶이다. 누가 그를 보고 인생의 루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의 공허한 손가락질일 뿐이다. 삶은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우물쭈물 하다가 끝나버린다. 진짜 끝.나.버.린.다.
 
.........
책 <그리스인 조르바> 中
재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에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 거리다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쳐버린다.
.........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톨, 허름한 화덕, 거친 파도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필요한 것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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