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장들] 이오시프 스탈린 5
■되살아난 공포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스탈린은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됐다. 이 시기에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현상도 본격화됐다. 이미 그전부터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전후에는 눈에 띄게 뚜렷해졌다. 소련 각지에 스탈린 동상이 세워졌고, 스탈린 찬가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졌다. 스탈린은 구름 위에 떠있는 '신'이 됐다. 거기에서 인민들을 내려다보며 때로는 공포와 통제를, 때로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존재였다. 스탈린이 영도하는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전쟁을 통해 확보한 동유럽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동독 등에 공산 정권이 수립됐다. 동유럽 위성국가 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소련의 노골적인 팽창 정책은 미국의 경계심을 극대화했다. 급기야 '트루먼 독트린'이 나왔다. 이는 소련의 권위주의적 위협에 맞서는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미국의 지원을 약속하는 외교 정책이었다. 기존의 '먼로 독트린'에 기반한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적극적인 개입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미소 냉전'이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트루먼 독트린에 이어 '마셜 플랜'도 나왔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인 조지 마셜이 내세운 대대적인 유럽 경제 지원책이었다. 이에 스탈린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설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유럽 9개국 공산당이 모여 정보 교환과 활동 조정을 통해 미국의 봉쇄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기구였다. 아울러 스탈린은 서방 진영을 압박하기 위해 베를린을 봉쇄했다. 이는 미국의 공수 작전으로 실패했다. 스탈린은 직접 전쟁은 피하는 대신 긴장 수위를 높이고 압박을 강화하는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스탈린 시대 특유의 공포 정치는 다시 부활했다. 대표적으로 '레닌그라드 사건'이 있었다. 1949년에 발생한 정치 숙청 사건으로,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한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를 숙청한 것이다. 당시 레닌그라드 도시 지도부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중앙 정부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스탈린은 이를 정치적 도전으로 간주했다. 수백 명이 체포, 처형됐으며, 지역당 조직은 해체됐다. 1952년에는 '의사 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반유대주의적인 정치 사건으로, 여러 의사들이 최고 지도부 인사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추후에 근거 없는 조작 사건으로 판명됐으며, 억울하게 구금된 의사들은 스탈린 사후에 석방됐다. 스탈린은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전쟁 영웅들까지 숙청했다. '독소 전쟁'의 영웅이었던 주코프도 군부 일선에서 배제됐다. 엘리트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도 강화했으며, 자신의 충견인 비밀경찰의 권력을 대폭 확대했다. 이 시기에 스탈린의 편집증적 성격은 극에 달했다.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병적인 의심이 줄어들기는커녕 매우 심각해졌다. 그럴수록 소련 사회는 더욱 공포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스탈린 시대 말기에는 냉전 시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열전인 '한국 전쟁'도 있었다. 이 전쟁은 스탈린이 깊숙이 관여했다. 북한의 김일성이 남한을 적화통일하기 위해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 승인 및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남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남침을 승인했다. 다만 군대 파병 등 적극적 지원은 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극적 지원만 하면서 대리자로서 중공을 내세웠다.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한국전에 참전하도록 설득, 유도했다. 이에 따라 중공군이 한국전에 전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전황은 매우 복잡해졌다. 이 전쟁은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끝나지 않다가, 그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종결될 수 있었다.
■이상한 죽음
스탈린은 죽음에 이른 시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과도한 편집증과 폭력성은 여전했다. 이때 스탈린은 대규모 추가 숙청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술했던 '의사 음모 사건'은 더 거대한 숙청의 전조로 평가된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스탈린이 좀 더 살았다면, 또 다른 대숙청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행히도 그와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인은 뇌출혈. 겉보기에는 단순 자연사로 보이지만,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될 정도로 '이상한 죽음'으로 여겨진다. 핵심적인 음모론은 '의도적 방치설'이다. 스탈린의 측근들이 치료를 늦춤으로써 사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탈린이 쓰러진 직후에 게오르기 말렌코프, 니키타 흐루시초프, 라브렌티 베리야 등은 의사를 즉시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베리야는 스탈린의 쓰러짐을 매우 기뻐하며 "이제 우리는 모두 자유다"라고 외친 것으로 전해진다. 침대에 누워있는 스탈린에게 대놓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으며, 스탈린의 의식이 잠시 돌아왔을 때에는 다시 충성 맹세를 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역사학자들은 이때 측근들의 행위가 "직접 살해는 아니지만 방치에 가까웠다"라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음모론은 '독살설'이다. 독극물(항응고제)에 의해 뇌출혈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증상(심한 출혈)이 단순 뇌출혈보다 비정상적으로 심했으며, 권력투쟁 상황에서 암살 동기가 충분했다는 게 근거로 제시된다. 베리야가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임 NKVD 수장들의 비참한 말로를 목도한 그는, 다음 숙청 대상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탈린이 죽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베리야뿐만 아니라 측근들의 집단 공모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다만 확실한 독극물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부검 자료가 불완전한 측면이 있다. 학계에서는 독살설 가능성은 있지만, 확증은 없다고 본다. 세 번째 음모론은 '쿠데타설'이다. 스탈린의 측근들이 집단적으로 제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상술했듯 스탈린은 말년에 다시 대숙청을 계획했다. 고위 지도부도 숙청 대상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를 두려워한 측근들이 죽지 않기 위해 스탈린을 먼저 제거했다는 설이다.
결론적으로 스탈린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뇌출혈이지만, 오로지 자연사로 보기에는 너무 수상한 정황이 많다. 가장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의도적 방치설이다. 스탈린은 자연사와 정치적 방치의 경계에서 죽었다고 보는 게 가장 설득력이 있다. 여하튼 스탈린은 소련 사회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강력한 독재자가 사라지자, 소련은 다시 집단지도체제로 복귀했다. 한동안 이 같은 체제가 이어지다가 눈에 띄는 지도자가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