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국 전쟁

[서기장들] 이오시프 스탈린 4

by 최경식
다운로드.png 1945년 4월,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국회의사당 건물에 소련 국기를 내걸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스탈린의 시대는 망하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지고 확립됐다.

■히틀러와의 거짓 협력

스탈린의 대숙청이 마무리될 즈음, 유럽 대륙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영토 확장과 침략 야욕을 드러내며 전운이 고조됐다. 독일과 소련은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히틀러는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과 민족성을 매우 혐오했다. 또한 자라나는 소련의 군사력을 위협적으로 여겼으며, 언젠가 소련과의 전쟁이 필연적으로 발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탈린도 히틀러와 나치즘이 지향하는 바가 소련의 그것과 완전히 상충된다고 생각했다. 기실 독일과 소련, 둘 다 국가주의 국가론에 기반한 '전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다만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은 노동자와 무산계급 주도로 국유화, 계획경제 등을 통한 평등사회를 지향한 반면 독일의 파시즘은 초엘리트 수뇌부의 주도로 국가 및 군국주의를 통한 적자생존, 불평등, 패권주의를 지향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비롯한 여타 국가들을 침략할 것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극동에서 일본의 위협도 상존하고 있었던 만큼, 그는 해법을 마련해야 했다. 결국 고립을 포기하고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국제연맹에 가입함과 더불어 전 세계 공산당 조직에게 혁명투쟁 포기 및 반파시즘 전선을 형성하라고 촉구하는 등 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 프랑스도 독일의 위협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탐탁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소련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협력이었다. 영국, 프랑스는 소련을 동등하게 보지 않고 하위 파트너 정도로 여겼다. 이에 소련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제안하면 시큰둥하게 반응하기 일쑤였다. 소련이 발트해-지중해에 있는 국가가 독일에게 침략을 당하면 세 국가가 힘을 합쳐 격퇴하자고 제안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동맹이나 군사 협정을 체결하자는 제안에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군사협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에, 소련은 스탈린의 최측근인 보로실로프 등 최고위급 장성들을 참석시켜 동원 가능한 소련의 군사력을 일일이 설명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특별한 권한을 갖지 않은 인사를 참석시켰으며, 소련에 비해 매우 미비한 군사력만을 제시했다. 일례로 소련이 약 120개 사단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고 하면, 영국은 기껏해야 16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다고 했다.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병합하려 하면서 불거진 '체코 위기' 때도 소련은 하대를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가급적 전쟁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에 주도적으로 나서서 독일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소련은 여기에 조금도 끼지 못했다. 체코 위기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뮌헨 회담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소련이 서구와의 연대에 회의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련 수뇌부에서 '영국에게는 적대적이고 프랑스에게는 냉담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스탈린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1939년 5월, 독일로부터 소련과 몇 가지 사안들을 놓고 협상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 시기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폴란드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폴란드 침공 시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히틀러는, 양면 전선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 동쪽의 소련을 구슬려 묶어두려고 했다. 독일이 제시한 협상안은 소련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불가침 조약'과 동유럽 영토 분할에 관한 비밀 의정서, 무제한적인 무역 재개 등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바라던 것들이 저절로 들어온 만큼,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8월, 독일 외무장관인 리벤트로프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갔다. 스탈린이 직접 나와 "우리는 그동안 서로를 참 많이 욕했습니다"라고 농담을 건네며 리벤트로프를 환대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협상이 진행됐다. 불가침 조약 건은 무난하게 넘어갔고, 동유럽 영토 분할 건에서 상호 간 이해관계 조정이 있었다. 히틀러가 쟁점이 될만한 라트비아를 포기하기로 하면서 이 건도 합의가 이뤄졌다. 마침내 소련의 외무상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한 테이블 앞에 앉아 관련 문서에 서명하면서, 독일과 소련 간의 협정이 체결됐다. 이 당시 몰로토프 뒤에 있던 스탈린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를 계기로 전쟁 위험에서 벗어남은 물론 옛 차르 제국의 영광까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듯하다. 히틀러 역시 협정체결 소식을 접한 직후 "이제 유럽은 내 것이다"라고 외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동쪽에 대한 염려는 제쳐두고 온전히 서쪽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국가의 반전 행위에, 영국과 프랑스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방심하고 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뒤늦게 진위 파악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전 세계를 참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제2차 세계대전이 곧 발발하게 될 것이었다.


■다가오는 파국

1939년 9월 독일군이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군도 빠르게 폴란드 영토로 진격했다. 협정에 의거한 대로 폴란드의 절반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목표는 순조롭게 달성됐다. 이후 소련군은 발트해 연안에 있는 국가들을 압박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이 소련군의 영향력 하에 놓였다. 또 다른 표적이었던 루마니아도 자신들의 영토 일부를 소련군에게 넘겨줬다. 스탈린은 이 기회에 소련의 영토와 군사적 지위를 크게 신장시킬 생각이었다. 다만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 핀란드에서는 재앙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소련군은 핀란드를 세력권 하에 두기 위해 수십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겨울 전쟁'이었다. 당초 쉽게 이길 것이라 확신했던 이 전쟁에서,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막강한 방어선인 '마너하임'에 발목이 잡혔다. 명중률이 매우 높은 핀란드군 저격수들과 스키 부대도 소련군을 극도로 괴롭혔다. 4개월 여만에 12만 명이 넘는 소련군 병력이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과거 스탈린의 혹독한 군부 숙청으로 인한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숙청으로 전력이 취약해진 소련군은 원시적 보병 전술에만 의존하다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병력을 대폭 충원한 뒤 물량 공세를 펼침으로써, 가까스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은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핀란드 영토 일부를 할양받았다. 결코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겨울전쟁의 책임을 지고 보로실로프가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티모셴코가 국방인민위원으로 임명됐다. 그는 나름대로 소련군의 전력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즈음에 독일군은 서유럽 전선을 휩쓸고 있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빠르게 함락된 데 이어, 막강한 육군력을 자랑하는 프랑스마저 단 6주 만에 독일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같은 전개는 스탈린의 바람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그는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서유럽 전선에서 발목이 잡혀 힘이 빠지길 바랐다. 그 사이 소련군은 전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넓혀가면서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차질을 빚게 되자 스탈린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영국과 프랑스의 패배를 의아해하면서도, 향후 독일이 소련에게까지 마수를 뻗칠 가능성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는 1940년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에 대한 적개심이 다시 점증했다. 독일군은 서유럽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소련군은 너무도 쉽게 이권을 챙기고 있다는 불만이 작용했다. 소련군이 발칸 국가들까지 노리고 있다는 첩보는 이 같은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나아가 히틀러는 영국과 소련의 관계를 의심했다. 당시 영국은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독일에 대적하는 국가로 남았다. 독일의 평화협상 제의를 물리치고, 치열한 항공전까지 불사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같은 저항이 소련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소련이 사라지면 영국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며, 미국 역시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봤다. 히틀러 특유의 사상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오래전부터 독일 게르만 민족이 살아갈 새로운 '생활공간'을 강조했다. 광활한 소련 영토는 이것에 적합한 것이었고, 독일군은 반드시 탈취해야만 했다. 구체적으로 아르한겔스크에서 아스트라한까지 뻗은 지역을 장악한 뒤, 게르만 민족을 이동시키고 그 땅과 원주민들을 식민 통치하는 것이었다. 우랄 산맥 너머에 있는 잔여 지역들은 소련인들로 채울 계획이었다. 이와 관련해 히틀러는 "소련을 독일의 인도로 만들겠다"라는 발언도 한 바 있다. 또한 인종주의에 심취한 히틀러는 유대인과 슬라브 민족들을 열등하게 여기고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조만간 '프리츠'라는 암호명으로 된 총통의 극비 명령이 하달됐다. 소련을 겨냥한 군사작전 예비 연구를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독일군 수뇌부는 히틀러에게 제한 전쟁 가능성을 알렸다. 히틀러의 결심은 시간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얼마 안 가 독일군 장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1941년 중순 정도에 소련의 '절멸'을 목표로 한 대규모 전쟁을 예고했다. 뒤이어 소련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할 대군을 조직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에 독일은 은밀히 소련과의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만책도 펼쳤다. 이탈리아, 일본과 1940년 9월 27일에 맺은 '삼국동맹'에 소련도 들어오라고 종용했다. 소련은 이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기실 스탈린의 의중은 다른 데에 있었다.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더 넓힐 수 있는 조약 체결을 원했다. 히틀러는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소련이 유럽이 아닌 영국령 인도로 나아가는 것을 제안했다. 당연히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히틀러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소련과의 거래를 청산할 최종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12월에 군사 지령 21호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서명했다. 독일이 세계의 운명을 바꿀 대전쟁을 열심히 준비하는 동안, 소련에서는 혼란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한편에선 독일군의 침공을 예상하고 '소극적' 대비를 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독일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미 없는 노력이 행해졌다. (후자는 히틀러를 두려워한 스탈린의 의중이 전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1940년 중순부터 국경선 일대에 요새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다만 그 요새들의 방어력은 매우 취약했다. 무엇보다 포와 무선통신 설비가 부족했다. 지뢰나 위장 등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국경선 일대에 기계화 군단과 비행 연대를 갖추려 했지만, 전쟁 직전까지 극히 적은 규모로만 갖춰졌다. 더욱이 이곳에 있는 병력은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고 사기도 최저 수준이었다. 지휘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 등 남서부 지역을 공격할 것을 가정한 군사 시뮬레이션도 돌려봤다. 항공 방어 등 나름대로 그럴싸한 방어 및 반격 계획이 도출됐지만, 실제로 당시 소련군의 전력을 감안할 때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일부 지휘관들이 그저 스탈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허황된 계획만을 열거했던 것이다.


히틀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스탈린의 행위는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는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독단적인 판단에만 의거해 히틀러를 상대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독일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할 가능성은 낮으며, 쓸데없이 독일을 자극할 만한 군사 행동은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이러한 기조로 인해, 국경선 일대에서는 소극적인 대비만 이뤄졌다. 불가침 조약 체결 당시 약속한 무역 의무는 충실하게 이행했다. 소련은 1년 5개월 동안 독일에게 석유 86만 5000톤, 곡물 150만 톤, 목재 64만 8000톤을 제공했다. 독일 해군에게 유익한 해상 기지를 제공했으며, 독일 공군에게 유익한 기상 보고까지 해줬다. 독일이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무역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전쟁이 임박한 시기에도 스탈린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때에는 소련 내외에서 독일군이 조만간 침공할 것이라는 경고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유명한 소련 간첩인 리하르트 조르게는 독일군이 1941년 6월 중순에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구체적 정보를 제시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비슷한 경고를 보냈고, 소련의 정보기관인 NKVD도 그랬다.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소련의 간첩이 직접 침공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모든 경고들을 무시하거나 반박했다. 독일과 소련의 좋은 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음모에 놀아난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심지어 전쟁 발발 하루 전날, 한 독일군 병사가 국경선을 넘어 "다음 날 독일군의 침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외쳤을 때 스탈린은 그 병사를 총살하라고 명했다. 스탈린의 의중을 충실히 떠받드는 소련 국영 통신사는 침공 정보를 일일이 반박하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두 가지 측면에서 스탈린의 판단을 분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현실적 측면이다. 그는 히틀러의 독일군이 확실한 수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을 침공할 순 없다고 확신했다. 광대한 소련 영토와 군대를 공략하려면, 독일군이 2배 이상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유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직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양면 전선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봤다. 입수된 첩보인 6월 침공설도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오래지 않아 소련의 혹독한 추위가 찾아올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관념적 측면이다. 자존심이 강한 스탈린은 아마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끝까지 인정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소련 국민들에게 군사 천재이자 무오류의 인간으로 '개인 숭배'를 주입해 온 마당에, 이와 배치되는 양태를 용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설령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생각이 들 법도 했겠지만, 이를 억지로나마 억누르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순간에는 고집으로만 일관하지 않았다. 되레 두려움과 초조함에 사로잡힌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줬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주변 사람들이 약간의 조언만 해도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마지막에 가서는 두려움을 못 이기고 슬그머니 경계령을 발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경계령 발동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이미 독일의 대부대가 동쪽으로의 이동을 거의 완료했다. (독일은 해당 부대가 영국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잠시 동쪽에 주둔하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스탈린은 이 독일군이 소련이 아닌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쪽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련 침공을 목전에 둔 독일군의 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146개 육군 사단으로 편성된 350만 명의 병력과 3350대의 탱크, 2500대가 넘는 항공기 등이 공격 태세를 갖췄다. 독일의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핀란드와 루마니아도 적지 않은 병력을 파견했다. 1941년 6월 21일, 전군에 '도르트문트'라는 음어가 내려왔다. 22일 새벽 3시 30분에 약 2000km에 달하는 국경선 전역에서 전면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이었다. 국경선에 있던 소련군 병사들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포착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운명의 22일 새벽,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인 '독소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대조국 전쟁-붕괴되는 소련군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직후 소련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는 독일 대사를 만나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독일 대사가 "지금 독일과 소련은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라고 말하자 몰로토프는 울먹이며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따졌다. 독일군의 침공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충격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전쟁 초반에 "레닌이 만들어놓은 나라를 우리가 다 망쳐놨다"라고 말하며 거의 잠적을 하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측근들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정신을 차린 후 전쟁을 지휘했다.)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진격하고 있었다.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구 페트로그라드), 중부 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거쳐 '코카서스'로 각각 쳐들어갔다. 레닌그라드는 볼셰비키 혁명의 발상지였고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였다. 코카서스는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된 곳이었다. 해당 지역들은 소련의 심장부나 다름없었다. 우선 중부 집단군은 스탈린의 잘못된 지시에 의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던 소련군을 잇따라 격파했다. 순식간에 민스크가 함락됐다. 뒤이어 모스크바에서 불과 400km 떨어진 스몰렌스크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앞선 전쟁에서 무서운 효력을 발휘한 '전격전'이 또다시 빛을 발했다. 이때 소련군은 제대로 된 전략 없이 맨몸으로 무리한 돌격만을 감행하며 희생을 키웠다. 스탈린의 '대숙청' 여파로 유능한 현장 지휘관들이 부족했던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거의 '학살'당한 소련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수많은 소련 전투기 및 탱크가 가동되기도 전에 파괴됐다.


중부 집단군은 승승장구했지만, 남부 집단군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소련군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지형적인 측면에서도 불리해 빠르게 나아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중부 집단군 일부를 남부 전선으로 보내 지원하도록 했다. 기갑부대 사령관인 '구데리안' 등 중부 집단군 지휘관들이 곧장 모스크바로 총 진격해야 한다고 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중부 및 남부 집단군이 키예프에 있는 소련군을 위아래로 포위 공격해 격퇴함에 따라 독일군은 남부에서 간신히 나아갈 수 있었다. 북부 집단군의 경우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상당했고 중부 집단군으로 일부 병력을 보내야 했기에, 레닌그라드 인근에 도달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레닌그라드 시민들과 소련군이 합심해 300km에 달하는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북부 집단군은 처음에는 레닌그라드에 포격을 가함과 동시에 포로로 붙잡은 소련의 노인들과 여성, 어린아이들을 앞세워 진격했다. 동포들을 본 소련군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스탈린은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고 동포들도 쏴 죽여라"라고 엄명했다. 아무 힘없는 소련인 포로들이 소련군의 발포에 쓰러졌다. 레닌그라드 방어가 생각보다 견고하다는 것을 깨달은 독일군은 이곳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게 아닌 탱크로 포위해 '말려 죽이는' 작전을 채택했다. (독일군의 포위는 무려 900일에 걸쳐 이뤄졌다.) 육상로가 끊겨 고립된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극심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렸다. 심지어 '인육'까지 행해졌다는 충격적인 보고도 올라왔다. 레닌그라드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한편 중부 집단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려 했다. 이때 예상보다 빠른 가을 우기가 찾아왔다. 땅이 진흙탕이 되면서 진격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번 모스크바 시민들과 소련군은 열심히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이 시기에 극동아시아에 있던 소련군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속속 들어왔다. 앞서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일과 동맹이었던 일본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극동에 병력을 계속 배치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의 정보원인 조르게가 일본이 소련을 치지 않고 미국을 겨냥해 남쪽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달했다. 이에 소련군은 마음을 놓고 극동에 있던 병력을 대거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가을 우기가 지나간 뒤 독일군은 망원경으로 모스크바가 보일 정도의 위치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악명 높은 '혹한'이 찾아왔다. 기실 히틀러와 독일군의 계획은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포함한 소련의 주요 대도시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물 건너갔다. 동계 전투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독일군은 일순간 큰 난관에 처했다. 보급선이 늘어지면서 적절한 물자 보급도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소련군은 동계 전투 준비가 잘 돼 있었다. 소련군 명장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는 독일군이 고전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소련군이 지금껏 수세였던 상황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공세로 전환했다. 처음 보는 소련군의 공세에 독일군은 충격을 받았다. 구데리안 등은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한 채 전략적 후퇴를 감행했다. 뒤늦게 독일군의 후퇴를 확인한 히틀러는 격노하면서 책임이 있는 70여 명의 장군들을 파면했다. 이어서 육군 총사령관에 올라 군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전쟁 및 군대 전문가가 아니었던 히틀러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독일 군부는 크게 위축됐다.


극적으로 모스크바 사수에 성공한 소련군은 여세를 몰아 각종 독일군 진지를 뚫으며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벽에 부딪혔다. 칼리닌과 서부전선군 사이를 연결하는 '르제프' 일대를 돌파하지 못했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위태롭게 돌출돼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독일군과 소련군 간 르제프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독일군이 가까스로 르제프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지만 소련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스탈린은 돌출돼 있는 르제프를 통해 언제든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이 이뤄질 수 있음을 우려한 만큼, 르제프 돌출구 제거를 집요하게 명했다. 히틀러는 반드시 사수할 것을 명함에 따라 독일군과 소련군 간 치열한 전투가 재차 벌어졌다. 짧은 기간 동안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병사들의 희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전선 상황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극심한 소모전 끝에 소련군이 물러나면서 르제프 공방전은 일단락 됐다. 이후 양국군의 최대 격전지는 중부에서 남부로 이동하게 된다.


■기사회생

독소전이 한창 전개되는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의 중대 분수령이 발생했다. 바로 '미국'의 참전이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군 기지를 기습 폭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루스벨트는 "치욕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라며 즉각 추축국들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선전포고했다. 시종일관 미국의 참전을 종용했던 처칠은 쾌재를 불렀다. 앞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을 침공했다. 일본군이 원활한 군수물자 공급을 위해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침공하자 미국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석유금수조치와 미국 내 일본자산 동결, 모든 교역 금지조치를 취했다. 일본군은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고 기어이 미국과의 전쟁을 감행했다. 기실 일본군의 행동은 일본은 물론 독일에게도 불길한 먹구름을 드리웠다. 의식이 깨어있던 사람들은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다. 일본의 한 장군은 "우리가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은 아닐까?"라고 우려했다. 독일 입장에선 가급적 미국을 중립국으로 묶어놓고 소련과 영국을 먼저 굴복시키는 게 순리였다. 미국과의 대결은 그다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헤비급 챔피언'과도 맞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소련 남부에 있는 코카서스에 집중했다. 모스크바 공략이 막히고 진격 속도가 정체되자, 지하자원이 풍부한 이곳을 점령해 독일군의 전력을 높이려 했다. 당초 소련군은 독일군이 또다시 모스크바를 공격할 것이라 예상해 대비에 나섰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독일군의 작전 계획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독일군은 일단 모스크바와 코카서스 사이에 있는 보로네시로 쳐들어갔다. 소련군은 참호를 깊게 파서 독일군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보로네시를 넘겨줬다. 이후 히틀러는 대대적으로 부대를 재편해 남부 집단군을 두 개로 나눴다. 한 부대는 코카서스로 진격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부대는 이 부대가 원활하게 진격할 수 있도록 통로를 확보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 통로에 해당하는 지역이 바로 '스탈린그라드'였다. 독일군은 코카서스 장악을 위해 반드시 이곳을 점령해야만 했고 소련군은 생명줄과 같은 이곳을 사수해야만 했다. 1942년 8월 23일, 독일군은 우선 폭격기를 대거 동원해 스탈린그라드 전역을 무차별 폭격했다. 이로 인해 무고한 소련 시민들이 죽었고 시내 건물들은 무너져내려 완전한 폐허가 됐다. 수십만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내부로 신속히 진격해 들어갔다. 초반에는 모든 게 독일군의 뜻대로 이뤄져 조만간 스탈린그라드도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전개됐다. 소련군이 부서진 건물 곳곳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쳤던 것이다. 독일 사령관인 '파울루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탈린그라드에 숨어있는 소련군을 일일이 제거하기로 했다. 이는 결정적 패착이었다. 독일군은 소련군이 원했던 '시가전'의 늪으로 고스란히 빠져들었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전투에 독일군은 당황했고, 상당한 희생과 함께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몇 개월이 지나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동쪽에 있는 볼가강에 다가서지 못한 채 시가전만을 치렀다. 소련군은 이런 식으로 버티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볼가강 뒤편에서는 지속적으로 소련군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히틀러는 코카서스로 향하는 부대의 일부 병력을 빼내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했다. 양국군 합쳐 총 1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맞붙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고 전장에서 죽으라"라고 명했다. (스탈린은 형벌부대와 저지부대를 동원해 후퇴를 하려는 병사들을 즉결처형했다.) 폐허 속에서 상호 간 무지막지한 살육이 계속됨에 따라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 포로, 민간인 피해를 발생시킨 전투가 됐다. 스탈린그라드의 길거리를 자가 아닌 '시체' 단위로 측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한 때 독일군이 볼가강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지만 소련군은 끊임없이 병력을 충원해 저항했다. 어느덧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소전의 모든 것이 돼 가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독일군이었다. 소련군은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전황이 풀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결정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천왕성 작전'이었다. 100만 명의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약 100km 떨어진 장소에 집결한 뒤 새벽에 독일군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이 작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지없이 밀렸다. 천왕성 작전은 대성공을 거뒀고 독일군 33만 명이 포위돼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초반에 유리했던 독일군은 일순간 낭떠러지로 몰렸다.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항복하려 했지만 히틀러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으라고 명했다.


파울루스는 병사들의 전멸을 좌시할 수 없었다. 끝내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소련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매우 처절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무적의 독일군은 참패했고 전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됐다. 히틀러도 커다란 충격을 받아 한동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힘의 균형은 소련군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이 뒤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침 이 시기에 또 다른 전선인 태평양에서도 추축국인 일본이 미국에 계속 밀렸다. 전쟁 초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미군을 몰아붙였지만 '미드웨이 해전'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미군은 괴력을 발휘하며 태평양 전쟁의 거의 모든 전선에서 일본군을 격파해 나갔다. 더욱이 미국, 영국, 소련이 유기적으로 연합해 추축국에 맞서기 시작했다. 미국은 영국에게 그랬듯 소련에게도 전쟁 물자를 대거 지원하며 큰 힘을 실어줬다. 기실 소련군이 독일군에 승리하는 데에는 미국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소련군은 1943년 7월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뒀다. '쿠르스크 전투'에서였다. 이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었으며 하루동안 벌어진 지상전으로는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힌다. 수천 대의 전차들이 뒤엉켜 일대 난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파괴된 수많은 전차들의 모습은 기괴하게 보일 정도였고 그 주변에 널브러진 병사들의 시체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승리한 소련군은 이제 독소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앞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승리해 잠시 사기가 올랐던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 패배 이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공세 역량을 상실했다. 후퇴하는 일만 남았다.


■소련의 승전

소련군은 보복에 나서듯, 독일군에게 전방위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1944년 1월, 포위망을 뚫고 레닌그라드를 해방시켰고 5월에는 우크라이나 등을 탈환했다. 미국-영국 연합군도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감행해 수도인 로마를 함락시켰다. 나아가 6월 6일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오버로드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제2전선' 및 프랑스 해방의 단초를 마련했다. 독일이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압박당하는 형국이 조성됐다. 소련군은 6월 22일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해 벨라루스에 있던 독일 중부 집단군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때 소련군은 약 6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한 독일군 장교는 "소련군 병사들을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시간이 갈수록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이에 따라 독일 내부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마침내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부와 동부 양측에서 미영 연합군과 소련군의 공세가 강화됐고 독일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미영 연합군은 1944년 8월 프랑스 파리를 해방시켰고 1945년 초에는 독일 본토 서부까지 침공, 라인강을 도하했다. 도하에 성공한 미영 연합군은 라인-루르에 있는 독일군을 포위 섬멸했다. 비슷한 시기 소련군은 동유럽에 있는 독일군을 격퇴한 뒤, 독일의 비스툴라-오데르강 지역에 공세를 가하고 동프로이센을 점령했다. 이어서 실레지아와 동포메라니아에 진입했다. 이 와중에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마지막 대반격인 '플라텐지 공세'를 감행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격퇴당했다. 4월 초가 되자 소련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고 미영 연합군은 함부르크와 뉘른베르크를 점령했다.


마침내 미군과 소련군은 4월 25일 엘베강에서 만났다. 양국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떠나 나치 독일에 맞서는 전우로써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 남은 것은 베를린이었다. 누가 먼저 베를린을 점령할 것인가를 두고 미영 연합군과 소련군 간 신경전이 있었지만, 소련군이 먼저 베를린으로 진입했다. 소련군은 최후 항전하는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4월 30일 국가의회 의사당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소련군 병사가 의사당 건물 맨 꼭대기에 올라가 소련 국기를 휘날렸다.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은 소련의 승리와 나치 독일의 패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5월 7일 독일이 소련군에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사실상 종결됐다. 한편 히틀러의 행방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국가수상부 구청사 옆에 있는 방공호인 퓌러엄폐호에 있었다. 곁에는 연인인 에바 브라운과 측근들이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패망을 직감했고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우선 독일 해군 사령관인 되니츠 제독을 자신의 후계자이자 차기 총통으로 임명하는 문서를 구술했다. 그런 다음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튿날 히틀러는 측근들과 조촐한 점심식사를 한 후 에바 브라운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확실하게 죽기 위해 입에 청산가리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 인류를 전쟁의 참화에 몰아넣고 유대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잔혹한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였다. 히틀러의 죽음 소식을 접한 스탈린은 "죽어버렸구나 개새끼. 내 손으로 죽였어야 했는데"라고 말했다.


히틀러의 경호원들은 상관의 시체를 벙커에서 끌어낸 뒤 가솔린을 뿌려 태웠다. 히틀러가 자신이 죽은 후 적군의 손에 시체가 넘어가지 않도록 미리 지시했기 때문이다. 경호원들은 최종적으로 포탄으로 패인 구덩이에 검게 그을린 시체를 묻었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히틀러의 마지막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히틀러가 이때 사망하지 않고 남아메리카로 몰래 도주해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음모론도 제기된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와 콜럼비아 등에서 히틀러 목격담이 나오기도 했다. 스탈린은 1946년 남미를 샅샅이 뒤져 히틀러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소련군이 히틀러로 추정되는 두개골을 발굴했는데, 추후 이 두개골이 여성의 것으로 밝혀져 '히틀러 여성설'이 대두했다. 이 밖에도 음모론은 다수 존재한다. 워낙 악명 높은 인물이라 이 같은 설들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스탈린의 소련은 절망적인 상황을 간신히 극복하고 승전국의 반열에 올랐다. 전쟁 중 실책이 많았던 스탈린이었지만, 해당 과오는 금방 잊혔다. 최종적으로 '대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영도자로 거듭났다. 전쟁으로 인해 스탈린의 시대는 망하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지고 확립됐다. -다음 편에 계속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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