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장들] 이오시프 스탈린 3
■대숙청, '예조프시나'
대숙청은 1936년부터 전개됐다. 초기에 주요 표적이 된 것은 한 때 명성을 날렸던 당 지도부 인사였다. 대표적으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이다. 이들에 대한 대규모 공개재판이 열렸는데, 의외의 장면이 연출됐다. 스스로 트로츠키와 결탁해 스탈린 암살 및 정권 전복을 모의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자백은 진실이 아니었다. 혹독한 고문과 협박, 가족 인질극 등으로 얻어낸 거짓 자백이었다. 대부분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볼셰비키 혁명 1세대 지도부는 거의 전멸했다. 국내에 있었던 인사만이 아니라 해외에 망명한 인사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트로츠키가 표적이 됐다. 그는 해외를 전전하면서 반 스탈린 운동을 펼쳤다. 스탈린 정권의 개인숭배와 관료주의 독재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배반당한 혁명>을 출간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항상 트로츠키를 예의주시했으며, 그의 목숨을 빼앗아갈 기회를 엿보았다. 이 기회는 1940년에 찾아왔다. 소련의 비밀경찰인 NKVD에 포섭된 스페인 출신의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가 신분을 속인 채 트로츠키에게 접근했다. 암살 기회를 포착한 그는 뾰족한 등산용 피켈로 트로츠키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트로츠키는 두개골과 뇌 부위에 치명상을 입었다. 머지않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이튿날에 세상을 떠났다. 천재 혁명가의 비극적 최후였다.
숙청은 전방위적으로 확대됐다. 고위급 인사를 넘어 일반 국민 전체가 표적이 됐다. 이를 주도한 것은 NKVD의 수장인 '니콜라이 예조프'였다. 이 키 작고 깡마른 인간은 오로지 스탈린에게 잘 보이기를 원했다. 자신의 주군이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공포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간파한 예조프는 매우 과도하게 숙청을 전개했다. 이 암흑의 시기를 '예조프시나'라고 부른다. 과거 귀족 출신, 외국과 접촉한 사람, 단순히 의심받는 사람, 이웃의 밀고를 받은 사람 등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즉시 총살되거나 굴라그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들에게 덧씌워진 혐의점은 '인민의 적' 또는 '자본주의 간첩' 등이다. 예조프시나 시기의 숙청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숙청 할당제'의 존재였다. 각 지역에 체포 및 처형 목표 수치가 떨어졌다. 지역 경찰은 이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로 인해 평범한 시민, 농민, 노동자까지 숙청 대상이 됐다. 또한 '삼인위원회'(트로이카) 재판이 열렸다. 이는 정식 재판 없이 빠르게 처형하기 위한 기구였다. 법치는 완전히 붕괴됐다. 사회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배신이 난무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항상 밀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으며, 침묵은 당연한 일상이 됐다.
군부 숙청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스탈린은 군대까지 의심했는데, 무력을 가진 이 집단이 언제든 자신을 축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표적으로 '종심 작전' 이론의 창시자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체포된 뒤 처형됐다. 뒤이어 붉은 군대 고위 장교들이 반역 혐의로 잇따라 제거됐다. 제거된 장교는 약 4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소련 군 지휘부의 70~80%가 소멸된 것이다. 군 지휘 체계가 철저히 붕괴되면서 소련군의 전력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이는 훗날 '독소 전쟁' 초기에 치명상으로 작용하게 된다. 소련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국가폭력인 '대숙청'(대테러)으로 말미암아 약 150만 명이 체포됐고, 70만 명이 즉결 처형됐다. 나머지는 굴라크 수용소로 보내져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다. 이들 가운데 실제로 죄가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무고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숙청은 점점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달았다. 이로 인해 각종 부작용이 초래됐다. 경제 혼란이 가중됐고 행정 부문에서 일부 마비가 왔다. 군사력도 약화됐다. 스탈린은 노선을 전환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기의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판단했으며 숙청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사냥이 끝난 사냥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탈린은 예조프가 숙청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으로 인해 과도한 명성과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실제로 NKVD 창설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예조프는 마치 스탈린보다 더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예조프를 내치기로 작정했다. 예조프는 1938년 11월에 실각했고, 1년 뒤 (후임인) 라브렌티 베리야의 NKVD에게 체포됐다. 어제의 부하들에게 끌려 나온 것이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독일과의 내통 및 무차별적인 숙청에 대한 책임이었다. 내통 죄목은 조작된 것이었다. 결국 예조프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가했던 방식 그대로 당하게 된 셈이다. 대숙청 책임의 경우 대체로 스탈린의 의중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지만, '예조프의 숙청'에 따른 고급 인재 증발 및 군부 전력 약화라는 죄목을 적용받게 됐다.
그는 지하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스탈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갖고 있다며 울부짖었다. 이어 베리야 앞에서 비굴하게 무릎을 꿇은 후 스탈린을 몇 분간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끝까지 스탈린의 이름을 연호하며 죽겠다고 맹세했다. 말미에 예조프는 소련 법률에 따라 최고 소비에트의회에 사면을 요청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스탈린이 자신의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라고 굳게 믿어 즉시 탄원서를 작성했다. 고문으로 손가락이 모두 부러져있던 예조프는 매우 힘들게 탄원서 작성을 완료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스탈린은 탄원서를 본 후 30분 만에 기각해 버렸고, 예조프에 대한 총살 집행을 명했다. 1940년 2월, 소련 대법원의 군사대학 건물 지하의 처형장에서 예조프는 비밀리에 죽임을 당했다. 이후 그와 관련된 각종 기록과 사진도 모두 삭제됐다. 주인을 위해 온갖 악독한 일은 다했지만, 그 주인에게 배신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예조프 밑에서 일했던 NKVD 요원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예조프처럼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이송돼 평생을 살아야 했다. 어제의 숙청자들이 내일의 시체가 되면서, NKVD 내에서도 숙청의 공포가 각인됐다. 스탈린은 전례 없는 숙청 작업으로 분명한 성과를 거뒀다. 그 누구도 반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다. 사회 전체에 공포와 복종 분위기가 만연했으며, 스탈린을 최정점으로 하는 완벽한 개인 독재 체제가 확립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