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투쟁과 집권

[서기장들] 이오시프 스탈린 1

by 최경식
이오시프 스탈린. 그는 레닌 사후 트로츠키 등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권력의 생리를 동물적 감각으로 꿰뚫어 본 악마적 천재였다.

■권력 투쟁과 집권

레닌이 갑자기 쓰러졌을 때, 곧바로 떠오른 화두는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세간에서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대표적으로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당내 최고의 엘리트이자 붉은 군대를 창시한 '레프 트로츠키'였다. 또 다른 한 명은 본편의 주인공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장인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표면적으로는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압도할 것처럼 보였다. 트로츠키는 당시 2인자로 여겨졌다. 결정적인 이유는 '볼셰비키 혁명' 당시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위대를 동원해 임시정부를 전복하자고 주장했고, 실제로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기 때문이다. 또한 선동 연설과 조직 부분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군사적 안목도 탁월해 과거 수많은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학문적인 식견이 출중한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권력의 최정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만한 성품으로 인해 당 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을 너무 맹신했고, 이를 기반으로 수많은 당 내 인사들을 무시하거나 모욕했다. 대부분의 당원들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트로츠키가 권력을 잡으면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겸 국방장관(육해군 인민위원)을 역임하고 있었다.) 또한 당원들은 트로츠키가 남들보다 늦게 볼셰비키에 가담한 것도 문제 삼았다. 이에 따라 트로츠키는 정치적 영향력은 있었지만, 사실상 자기 계파가 없는 1인 정파에 가까웠다.


반면 스탈린은 트로츠키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하고 겸손하며 묵묵히 자기 할 일에 매진하는 전형적인 관료로 비쳤다. 자연스럽게 당원들의 마음은 트로츠키보단 스탈린에게 기울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스탈린의 전력을 살펴보겠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 당시 비밀 지하 활동과 불법적인 선전 활동 등을 활발히 수행하며 몇 번의 체포와 유형, 탈출을 반복했다. 또한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조직하는 일에도 뛰어들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12년 스탈린은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됐으며, 레닌의 요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프라우다'를 창간하고 편집인까지 맡았다. 마침내 볼셰비키 핵심 지도부에 편입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스탈린'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강철'을 뜻하는 러시아 이름이었다.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스탈린은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 자기편으로 만들고 당 내에서 입지를 강화해 나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트로츠키는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는 데에 위기감을 느끼고 반격에 나섰다. 그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편지와 연석회의에서 스탈린이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등과 연합해 자신을 몰아내고 국가를 망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스탈린도 맞대응했다. 그는 트로츠키가 현실을 모르고 정책에 트집을 잡는 분파주의자이며, 레닌의 뜻을 거스르는 이단아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당원들은 스탈린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고, 투표를 통해 트로츠키를 분파주의자로 규정했다. 열세에 직면한 트로츠키는 언론 및 저작 출판 활동을 통해 공개 논쟁과 당 중앙위원회 반대 운동 등을 펼치며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될 뿐이었다. 1924년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레닌의 뜻을 따라 당의 완전한 단결을 강조하면서 트로츠키를 분파주의자로 재차 지목했다.


후계자 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레닌의 의중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미리 유언장을 써놓았다. 앞선 <레닌편>에서 살펴봤듯,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격하게 비난함은 물론 당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도 비판했지만, 훌륭한 역량을 갖췄고 주변에서 적절히 조율해주면 된다고 했다. 사실상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를 당부했다. 만약 레닌이 몇 년만 더 살았다면, 스탈린은 당에서 축출됐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레닌이 후계자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은 채 1924년 1월에 사망함으로써 스탈린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레닌의 유언장이 공개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정치국원들은 스탈린의 바람대로 유언장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결정이 나온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정치국원들은 레닌이 자신들도 비난한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유언장 공개로 스탈린이 사임할 경우 트로츠키가 권력을 잡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의 행동이 매우 중요했는데, 그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엇나갔다. 레닌 유언장 비공개에 대해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스탈린을 포함한 다른 정적들을 여전히 과소평가하며 소극적으로 나왔다.


이런 가운데 스탈린은 레닌의 죽음을 이용해 트로츠키를 또 한 번 난관에 빠뜨렸다. 레닌이 사망할 즈음 트로츠키는 지방 순방 중이었는데, 스탈린은 일부러 그에게 장례식 일자를 잘못 알려줬다. 트로츠키의 장례식 불참을 유도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그를 '반레닌주의자'로 몰아가려 했다. 실제로 트로츠키가 레닌 장례식에 불참했을 때, 많은 소련인들은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를 의심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트로츠키는 레닌의 후계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생겼다. 이후 5월에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분파주의자, 해당분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그를 반레닌주의자로 규정했다. 트로츠키의 설 자리는 거의 사라졌다. 좌절한 그는 다음 해인 1925년 1월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즈음에 군권을 내려놓게 됐다. 뒤이은 정치국 회의에서는 트로츠키에 대한 '제명' 주장까지 나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탈린이 제명은 반대해 무산됐다.


한편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정치적 이론 대결에서도 트로츠키는 완패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 후진국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로 복귀할 위험도 존재하므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 특히 선진국 사회주의 혁명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유럽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관점은 사회주의의 국제주의적 성격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이와 달리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론'을 주장했다. 소련은 다른 나라의 혁명에 관여할 것이 아니라 자국의 발전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면, 선진국 사회주의 혁명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공산주의로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소련인들은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을 부담스러워했다. 당장 자국의 상황이 녹록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나라 혁명까지 신경 쓸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우선적으로 자국의 발전을 도모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최대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를 어느 정도 밀어낸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1인 독재체제'를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다음 상대는 정치적 동지였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트로츠키라는 공동의 적이 강성할 땐 연합했지만, 이제 그것이 힘을 잃자 정적으로 돌아섰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의 권력 장악을 우려하며 '당내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통합반대파를 구성하고 스탈린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13인 선언'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당과 정치국 등을 장악한 스탈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분파주의자로 몰려 정치국에서 축출됐다. 이후 잠잠했던 트로츠키가 다시 등장해 스탈린에게 대항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미 대세는 완전히 기울었지만, 그는 작심한 듯 최후의 공격을 전개했다. 트로츠키는 15차 당 협의회에서 스탈린에 대해 "공산당의 무덤을 파는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이후 정치국에서 제명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당 중앙위원회-중앙통제위원회 연석회의에 나가 스탈린을 "레닌에게 불충하고 무례했던 분파주의자"로 규정했다. 곧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스탈린은 물론 부하린, 카가노비치, 지방 당서기들까지 나서서 트로츠키를 '반레닌 분파주의자', '반혁명분자'로 몰아세웠다. 결국 그는 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당에서 완전히 제명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이후에도 스탈린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다가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았다. 추후에는 아예 소련에서 추방됐다.


스탈린이 1인 독재로 가는 데에 있어 마지막 표적이 된 것은 부하린이었다.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이자 오래된 친구였다. 부하린은 지노비예프의 뒤를 이어 공산주의 국제연합인 '코민테른'의 서기장이 됨으로써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 큰 입김을 행사했다. 이때 스탈린과 함께 사실상 '이두 정치'를 지휘한 셈이었다. 하지만 경제개발 방법론에 있어 스탈린과 마찰을 빚으면서 권력에서 점차 멀어지게 됐다. 부하린은 스탈린의 농업집산화와 급격한 중화학공업화를 반대했다. 대신 점진적인 중화학공업 추진과 농업 및 경공업 성장과 연계한 경제 개발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과거 트로츠키파들이 스탈린 노선 지지로 전향하는 등 상황은 부하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그는 힘을 잃었고 1929년 정치국에서 쫓겨났으며 여생을 숙청에 대한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부하린이 밀려나면서 스탈린은 소련에서 더 이상 대적할 자가 없는 명실상부한 '독재자'가 됐다. -다음 편에 계속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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