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부작용

[서기장들] 이오시프 스탈린 2

by 최경식
스탈린이 강력하게 추진한 농업집산화 정책. 겉보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만만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하면서 스탈린은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부작용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소련을 서구 열강에 필적하는 공업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1928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산업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도 산업화가 추진됐지만, 귀족 지주들이 인력과 토지를 대거 점유한 탓에 산업화는 지지부진했다. 러시아는 계속 낙후된 농업 국가로 남았다.) 스탈린은 우선 귀족 지주들을 가혹하게 숙청했고, 농업집산화(집단농장화)를 이뤄내면서 막대한 인력 및 토지를 획득했다. 뒤이어 해당 자산들을 고스란히 중공업 부문으로 밀어 넣었다. 이후 '콤비나트'라는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됐고, 1500여 개의 공장이 들어섰다. 이를 기반으로 소련은 급격한 산업화의 길로 나아갔다. 또한 스탈린은 소련 국내 생산품의 사용을 적극 유도했으며, 수입품 억제와 더불어 수출산업 육성 및 자국제품 수출 증대에도 힘썼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말기에는 소비재 생산과 군수산업에 큰 비중을 두고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이 같은 경제 정책은 결과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우선 각종 생산량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1928년부터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소련에서 강철은 4.5배, 전력은 8배, 시멘트는 2배, 석탄은 4배, 석유는 3배로 늘어났다. 더욱 두드러지는 건 경제성장률이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소련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경제대공황'으로 인해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급기야 1938년 소련은 영국, 프랑스 등을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전까지 낙후된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소련이 단기간에 미국마저 넘보는 공업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게 뒤따랐다. 농업집산화와 급격한 산업화 등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농업 생산에 회의적이 되면서 자연스레 농업생산량이 급감했다. 그 결과 '대기근'이 발생했다. 특히 과거에 비옥한 토지로 유명했던 소련의 자치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최소 250만 명에서 최대 3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홀로도모르'라고 부른다. 아울러 성급하게 건설한 공장에서 기계 고장이 자주 발생했고, 수많은 노동자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각종 시위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부작용에 대한 스탈린의 대처는 온당하지 못했다. 그는 기근 지역에 식량을 충분히 보내지 않았으며, 수출을 하기 바빴다. 산업화를 위한 자본을 구하는 데 치중했기 때문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시위에는 시종일관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들을 극심하게 탄압하는 것은 물론 간부 및 산업 관리인들도 경영 잘못의 책임을 물어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스탈린의 경제정책 부작용과 대처 방식은 국민과 당 내부에서 커다란 반감을 야기했다. 스탈린의 반대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스탈린 이후'를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스탈린을 대체할 새로운 지도자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때 한 인물이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바로 레닌그라드시 지구당의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였다.


■키로프 암살

키로프는 스탈린의 부하이면서 각별한 친구였다. 스탈린은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는 편이었지만, 유독 키로프만큼은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키로프 역시 스탈린에 대한 애정이 컸고, 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26년 스탈린과 부하린의 연합에 가담해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연합에 맞서기도 했다. 그런데 스탈린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키로프에게 호감을 가졌다. 무엇보다 키로프의 긍정적인 성품이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는 합리적이고 온화하며 개방적인 성품을 갖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소련 정치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형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수차례 당대회를 거치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키로프는 1926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됐고, 지노비예프를 제치고 후임 레닌그라드당 제1서기에 임명됐다. (레닌그라드당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당원들의 더 큰 신망을 얻게 된다.)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재선 됐으며, 1930년 제16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 위원 및 서기국 서기, 조직국 위원으로도 선출됐다. 당시 키로프의 높은 인기로 인해 단 한 개의 반대표도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서기국 선거를 할 때는 스탈린을 대신해 서기장에 선출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어찌 보면 스탈린의 권력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모양새로 비쳤다.


그런데 1934년 12월, 별안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도유망한 키로프가 괴한에 의해 암살을 당한 것이다. 모든 소련 국민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키로프를 암살한 범인은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였다. 그는 키가 152cm로 작고 마른 체형이었다. 당원이었지만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시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당으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았다. 이후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했으며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니콜라예프는 당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다. 심지어 친구에게 자신을 제명시킨 당 통제위원장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의 부인은 지역 당위원회 위원이었는데, 니콜라예프는 그녀가 키로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심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니콜라예프는 10월에 키로프가 있는 스몰니 연구소에서 서성거리다가 소련의 비밀경찰인 'NKVD'(내무인민위원회)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NKVD는 니콜라예프의 서류 가방에서 권총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특별한 범죄 혐의점은 없어 풀려났다. 이후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키로프에 대한 당국의 보호 조치가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스탈린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소련의 관리는 "이렇게 고위 당 간부를 NKVD가 보호하지 않은 것은 태만이며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12월에 니콜라예프가 다시 스몰니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니콜라예프는 아무렇지 않게 3층으로 갔고, 키로프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목이 관통된 키로프는 즉사했다. 그의 장례는 크렘린 장벽 네크로폴리스에서 국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화장됐다. 스탈린과 주요 공산당 간부들이 직접 키로프의 관을 운반했다. 암살범인 니콜라예프는 비밀리에 재판을 받은 후 총살 당했다. 레닌그라드 지부 소속 NKVD 간부 몇 명은 키로프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최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키로프 암살과 관련해 큰 논란이 불거졌다. 핵심은 암살 배후에 스탈린이 있다는 것이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당시 스탈린이 각종 실책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강력한 경쟁자인 키로프가 급부상했다. 스탈린은 난관을 타개하고 억압과 통제를 실행할 구실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키로프 암살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은 이를 통해 정적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해 나갔고 자신의 권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암살 전후 상황을 돌이켜봤을 때,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흐루시초프는 그 유명한 1956년 비밀연설에서 스탈린에게 간접적으로 혐의를 씌웠다. 그는 키로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NKVD 요원들이 1937년 사살됐는데, 이는 "키로프 암살 조직자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스탈린 공모와 관련한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며, 암살 배후 주장은 전적으로 소문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흐루시초프 재임 기와 1989년에 소련 수사기관에서 키로프 암살에 스탈린이 개입돼 있는지를 수사했지만, 끝내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종결됐다. 더욱이 스탈린이 사건 직후에 보인 행동도 반론의 근거가 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키로프가 암살되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전화기에 대고 쌍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보로실로프와 몰로토프를 데리고 레닌그라드로 달려가서 니콜라예프를 직접 심문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우정을 쌓은 몇 안 되는 친구였던 만큼, 이러한 스탈린의 행동은 진정 어린 슬픔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됐다.


여하튼 키로프 암살은 소련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스탈린은 이를 계기로 전방위적인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향한 암살 의구심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로 본다면, 스탈린은 국가 지도자에 대한 물리적 위협이 극에 달했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도 암살당하거나 축출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사회 곳곳에 위해를 가할 만한 '반혁명분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을 모조리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 내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 정치적 위기 국면을 단번에 타파하고 권력을 효과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마침내 소련 사회를 대공포의 시대로 몰아넣는 '대숙청'의 서막이 올랐다. -다음 편에 계속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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