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1] 통일신라 수성형 군주, 왕권강화 전말
#.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의 서두 부분.
"과인이 왜소한 몸과 볼품없는 덕으로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느라 먹을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복도 벗지 않은 때에 경성에서 난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겠는가? 적괴의 우두머리 김흠돌, 김흥원, 진공 등은 벼슬이 자신의 재주로 오른 것이 아니고 관직은 실로 성은(聖恩)으로 오른 것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마침내 불인(不仁)·불의(不義)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려 관료들을 깔보고 위아래를 속였다. 날마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을 왕성히 하고 포학한 마음을 제멋대로 하여 흉악하고 나쁜 이들을 불러들이고 왕실의 근시들과 결탁하여 화가 안팎에 통하게 되었다. 똑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서 날짜를 정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반역을 행하고자 하였다. 과인이 위로 천지(天地)의 보살핌에 힘입고 아래로 종묘(宗廟)의 영험을 받아서인지 김흠돌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자 그들이 도모하던 역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므로 병사들을 추가로 모아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나쁜 무리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신문왕 '교서' 中
역사적으로 한 국가의 가치는 크게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는 국가를 세우는 것과 국가를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자가 중요하고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이것보다 더한 것이 바로 후자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창업기가 지나면, 왕권과 공신 세력으로 대변되는 신권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고 흔한 일이다. 이를 단호하게 제어하지 못할 경우 내부 갈등과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가뜩이나 불안정한 신생 국가를 나락(奈落)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역대 왕조를 보면 건국은 무난하게 해도 수성에 실패해 단명한 왕조들이 적지 않다. 신생 국가의 기틀을 끝내 다지지 못했던 까닭이다.
수성을 구현함에 있어 무엇보다 군왕의 역할이 중요하다. 해당 가치에 부합하는 군왕이 존재해야 그 국가는 비로소 오래갈 수 있다. 한반도에서 장기간 존재했던 국가인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는 이 같은 군왕들이 존재했었다. 통일신라엔 신문왕, 고려엔 광종, 조선엔 태종(이방원)이 있었다. 특히 이 책의 첫째 편에서 살펴볼 신문왕은 수성형 군주의 '전범'(典範)이라 할 만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대인 삼국통일기, 제2의 창업 기를 지나 왕위에 오른 신문왕 앞에는, 거대하게 공신 세력화된 진골 귀족들과 완전히 편입되지 못한 고구려계 유민들, 그리고 위태로워진 왕권이 있었다. 치밀하고 냉정하며 유능했던 신문왕은 지금 시대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왕권 강화'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했고, 이를 위해 진골 세력 및 고구려계 유민 등에 대한 냉혹하고 과감한 '숙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숙청이 완료된 후에는 녹읍 폐지와 군제 개편 등 각종 제도 정비까지 단행해 당초 목표를 완벽히 달성했다. 신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성덕왕 등은 이 같은 반석 위에서 통일신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8세기 중엽까지 지속된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창업에서 수성의 시대로. 이 어려운 격변의 시기를 성공적으로 감당하며 사직(社稷)을 바로 세운 수성형 군주, 신문왕의 '진골 숙청'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