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2] 개혁과 광기의 양면성
#.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의 서두 부분.
"광종(光宗)은 즉위 후 한동안 아랫사람을 예로써 대접하고 항상 호부자(豪富者)와 억센 자들을 억제하였으며 백성들에게도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자못 볼 만한 정치를 이룩하였다...(중략)...또 불교를 혹신하여 국고를 낭비하였으며 말년에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외아들에게까지 의심을 품어 잘못하면 경종도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했다." -최승로 '시무 28조' 中
신라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통일국가인 '고려'는 태조 왕건이라는 인물에 의해 건국됐다. 그가 통일 및 건국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정책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바로 '대통합' 정책이다. 왕건은 전국 각지의 호족은 물론 주적인 후백제의 견훤과 신라도 품었다. 그 결과 호전적인 궁예, 견훤 등과 달리 유화적인 왕건의 곁에 수많은 세력들이 자발적으로 들어와 협조했다. 왕건은 '창업군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업이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완수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정책과 기조도 변하기 마련이다. 왕건의 정책은 통일 이후에도 지속될 순 없었다. 통일 과정에서 주효했던 대통합 정책은 되레 국가와 왕권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신생국가 고려엔 강력한 왕권과 개혁을 기반으로 한 '수성'이 필요했다. 통일신라의 신문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수성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군왕이 바로 고려 제4대 왕인 '광종' 왕소였다. 그는 대통합 정책을 통해 비대해진 호족 세력에게 속절없이 휘둘렸던 혜종과 정종의 경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다. 이에 따라 광종은 유약한 전임자들과 달리 호족 세력에게 매우 영악하게 대응했다.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며 동력을 확보했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밀어붙여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과거제'(科擧制) 등으로 대변되는 광종의 개혁은 지금까지도 국내 역사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눈부신 성과물이다. 이를 통해 신생국가 고려는 탄탄한 기틀을 다짐으로써 500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만 보면 광종의 '광'은 '빛날 광'(光)으로 보인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 수성에 대한 집착과 의심이 과도했기 때문이었을까. 집권 후반기에 광종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피의 숙청'과 '공포 정치'를 단행한다. 명백히 문제가 있는 사람과 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광종 대엔 그렇지 않은 사람 및 세력들도 대거 제거됐다. 사회 곳곳에서 참소(讒訴)와 고변(告變)이 난무하며 피바람이 불었고, 불신과 음모가 판을 쳤다. 호족은 물론 왕족들(외아들 포함)도 무사하지 못했다. 후임자인 경종 대엔 광종 숙청의 부작용(복수법)이 나타나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만 보면 광종의 '광'은 '미칠 광'(狂)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면성이 극단으로 존재하는 광종. 지난 역사를 돌이켜 봐도 이러한 군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광종이 고려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통틀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군'(名君)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빛나거나 미치거나' 했던 광종의 개혁 및 '호족, 왕족 숙청'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