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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Jun 12. 2018

25년 된 파제로를 타고 몽골 고원을 달렸다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으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대지가 주는 압도감을 경험한 적 있다. 4년 전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였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의 끝에서 붉게 물든 하늘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걸 보았을 땐, 나 자신이 너무나 미미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장엄의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무겁게 짓누른다. 자연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압도감과 공포감을 선사하고는 이내 머리 위로 은하수를 흩뿌리며 미미한 존재의 마음을 달랬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몽골 고원을 다녀오면서 희미하게 잊힌 나미비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미비아와 몽골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대륙이지만 두 나라는 꽤 닮았다.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농작물을 경작하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농작물을 심을 수 있다고 해도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해 그걸 버텨낼 농작물이 많지 않다. 몽골의 농경지 대부분은 목초지이며, 경작이 가능한 토지는 전체 농경 면적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무도 자라기 힘든지 민둥산이 대부분이다. 그저 생명력 질긴 잡초들만이 널은 고원에 붙어있을 뿐이고, 그 풀을 찾아 유목민들이 소, 말, 양을 끌고 넓은 땅을 유랑한다. 몽골은 지구 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전통 유목국가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몽골은 남한 면적의 15배나 되는 큰 땅을 지녔지만 인구는 고작 3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인구의 절반이 수도 울란바토르에 살고 나머지 반은 유목민이다. 인구가 적으니 당연히 대중교통시설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몽골에선 자동차가 필수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차를 하나 빌렸다. 1982년 처음 출시된 미쓰비시 1세대 파제로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빌린 것인데 주인이 따로 있으나 연식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 25~30년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배기량도 모른다. 후드를 열고 직렬 4기통이라는 것만 확인했다. 연식에 비해 차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엔진 소리에 막힘이 없고 어디 찌그러지거나 부식된 곳도 찾지 못했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테를지 국립공원까지 거리는 60킬로미터 정도. 한국이라면 1시간 이내에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몽골에선 그게 힘들다. 우선 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왕복 2차로 아스팔트가 깔리긴 했지만 여기저기 갈라지고 파였다. 또 소, 말, 양들이 도로를 가로막기 일쑤다. 가이드에 따르면 몽골에 7800만 마리 정도의 양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도 정확한 수가 아닌 추정일 뿐이다. 많은 수의 말과 소, 야크도 울타리 없는 초원을 자유롭게 거닐며 풀을 뜯는다. 모두 주인이 따로 있는 게 신기하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도로 사정이 좋다고 해도 빨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파제로를 닦달해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올렸더니 차체가 너무 흔들려 ‘이러다 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흘 동안 이 차를 타면서 찾아낸 적정 최고속도는 시속 80킬로미터였다. 가끔 길게 쭉 뻗은 상태 좋은 아스팔트를 만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도 차가 너무 흔들리고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었다. 오직 ‘저 지평선 끝에선 어떤 풍광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를 상상하며 웃음을 질질 흘릴 뿐이었으니까.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아스팔트가 끝나는 곳에선 당연히 오프로드가 시작된다. 나미비아는 비가 내리지 않아 비포장길이라도 노면이 굴곡이 없어 시속 140킬로미터까지 달리기도 했다. 반면 몽골은 비와 눈이 많이 온다. 길마다 진창과 물골이 생기고 그게 굳어져 노면 굴곡이 심하다. 차고가 높은 네바퀴굴림 SUV가 아니면 달리기 힘들다. 다행히 파제로는 지상고가 높은 파트타임 네바퀴굴림이다. 다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충격흡수가 잘되지 않고 차체가 많이 흔들렸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테를지는 제주도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국립공원이다. 어디를 보든 초록 지평선이 보이고 지평선이 아니면 거대한 돌산이나 민둥산뿐이다. 그리고 그 위엔 눈이 시릴 만큼(진짜 시리다) 파란 하늘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 빛을 오롯이 받아낸 초록과 파랑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밝아진다. 몽골인들의 시력이 좋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가이드에 따르면 몽골에선 안경잡이를 보기 힘들단다. 88세의 할머니도 돋보기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고원을 더 멀리 보기 위해 게르(유목민 텐트) 캠프 뒤에 있는 바위산에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경사가 급한 것도, 아주 높은 것도 아닌데 쉽게 지치고 힘들다. 결코 내가 늙어서가 아니라 산소가 약간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테를지는 해발 1600~2000미터에 있다. 한라산 백록담(1947미터)에 준하는 높이다. 그래서 ‘고원’이라 부른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다시 파제로에 올라 4L 모드로 당겼다. 테를지 국립공원의 산엔 나무가 거의 없어 경사만 가파르지 않으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슬립이 일어 못 오른다면 그냥 뒤로 후진하면 된다. 테를지는 어디든 대충 셔터만 누르면 먼 훗날까지 고이고이 간직하고픈 인생샷이 나온다. 낡은 파제로도 몽골 고원에선 멋진 피사체다. 하긴 이차는 이런 곳을 수도 없이 올랐을 것이다.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한 고비사막에도 다녀왔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미비아에도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나미브사막이 있었다. 두 나라는 닮은 곳이 많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산 위에서 한참 동안 있었는데 아직도 해가 중천이다. 한여름 몽골은 해가 오후 10시에 떨어지고 새벽 4시 30분에 동이 튼다. 하루가 굉장히 길지만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던 건 늙은 파제로 덕분이다. 풍광이 아무리 좋다 해도 하루 종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파제로가 없었다면 그 풍광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나는 또 다른 풍광에 넋을 잃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몽골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차를 빌려 다니길 권한다 문제는 길 찾기인데, 몽골은 울란바토르를 벗어나면 인터넷이 잘 안 된다. 따라서 인터넷 연결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지도 앱(맵스미)을 깔아야 한다. 몽골은 도로가 많지 않고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 길 찾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사진: 민성필(TEAMROAD STUDIO)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 무시무시하던 한낮의 열기도 마법처럼 사라지고 눈이 닿는 모든 것을 불게 물들이는 기적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진다. 이윽고 달빛을 품은 냉기가 고원을 감싸면 불빛 하나 없는 고요의 어둠이 밀려오는데 이 어둠이 또 다른 신비의 시간을 만든다. 초원에 누워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밤하늘을 유영하는 착각에 빠진다. 달이 없는 그믐이면 은하수까지 볼 수 있으니 어쩌면 별을 새면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될지도 모른다. 몽골의 여름밤은 아주 짧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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