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isha Mar 22. 2023

그림자 놀이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길을 걸어가다 잠시 나무 아래 섰다. 좀 살 것 같다.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나뭇가지 사이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나무의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친구들과 그림자밟기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처럼 나무의 그림자를 지그시 밟아본다.


어린 시절 그림자는 놀잇감이었다. 그림자가 밟히면 술래가 되는 그림자놀이를 친구들과 하곤 했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초저녁에 시작하면 술래가 빨리 바뀌어 박진감이 넘쳤었다. 내가 술래가 되면 숨이 차도록 친구들을 쫓아가 그림자를 밟았지만, 곧 다시 잡히곤 했다. 그러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그림자를 삼켜버리면 한순간에 무서워져 얼른 집으로 들어가자고 친구들을 졸랐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림자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그림자를 삼켜버린 어두운 밤도 무섭지도 않다. 다만, 눈에 보이는 그림자가 아닌 내 마음에 그림자가 생기면 문득 무서울 때가 있다. 내 마음속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어둠이 바로 내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럴 때는 내 마음의 그림자와 나, 둘이서만 그림자놀이를 한다.


어느 작가의 책을 손에 잡은 밤이었다. 가볍게 시작해 중간 정도만 읽고 그만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는데 도통 그 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읽어내기 쉽고도 속 깊은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책의 끝 페이지를 덮은 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물 한잔을 마셨다. 난생처음으로, 좋은 글을 접해서 생긴 신나는 감정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의 감정이 함께 떠올랐다. 내 마음의 그림자에게 잡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적지 못할까?’의 의문과 함께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이리도 열심히 자신을 빛내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자괴감도 들었다.


잠자리에 누워있는 동안에는 이불을 발로 찼다. 이불이 퍽 소리를 내며 힘없이 날아갔다. 죄 없는 이불을 날려버릴 시간에 사색이라도 좀 더 했으면 좋았건만, 날아간 이불을 발로 찍어 누르며 그 밤, 한동안 질투에 사로잡혔다. 그것을 핑계로 얼마간 글도 쓰지 않았다. 나태함으로 정점을 찍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때쯤에는 ‘에이, 남들에게 재미없으면 좀 어때? 내가 쓰면서 재밌으면 된 거지.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내게도 좋은 글이 나오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그림자에게 술래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쉽게 잡고 잡히다가도 가끔은 그림자의 어둠이 너무 짙어 헤어 나오기 버거울 때도 있다. 그러면 그림자 없는 밝은 세상을 생각해 본다. 음... 세상은 온통 환하고 따듯한 빛투성이겠지. 상상하니 눈이 부셔서 눈 하나가 저절로 감긴다. 눈에 보이는 어둠의 그림자도 마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한동안은 빛(복)에 겨울 것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눈부시고 따듯한 것이 당연한 줄 알지 않을까?


어둠과 빛을 모두 경험해 보아야만 밝은 빛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어두운 것은 어두운 데로 빛을 찾는 등불이 되어주는 것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도 더 밝게 드러난다.


내 인생의 작은 일상을 빛내고 그 여정을 통해 성장하기 위해, 나의 그림자놀이는 계속될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또 언제고 반복이 되더라도 그림자 요놈은 내가 꼭 잡고야 말리라.

 

작가의 이전글 '내'가 '나'라서 행복한 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