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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ish Mar 30. 2020

어렵게 살겠습니다.

두 번의 에피파니가 나에게 준 답

나는 영어 단어 중에서 "Epiphany"라는 단어를 사랑한다. 단어의 원뜻은 "예수 공현, 신의 출현"을 의미하지만, 원뜻보다는 문학적으로 사용될 때의 의미 - 갑작스러운 정신적 계시, 평범한 순간 속에서 불현듯 얻은 깨달음 - 가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계시에 가까운 어떤 깨달음을 얻는 상황은 뭔가 극적이고 특별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상 속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니, 해석부터가 소위 말하는 "스웩"이 넘쳐흘렀다. 대학교 영문학 시간에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다루면서 처음 접한 그 단어는 단어의 철자, 8개의 스펠링이 모여 갖춘 모양새, 그들이 만들어내는 발음의 조화로움, 멋짐이라는 게 폭발하는 뜻 모두 다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맥락에 따라 종교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사용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진짜 쿨하다고 생각했다.




단어를 알지 못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도 그런 "에피파니"의 순간이 있었다. 최초의 에피파니에 대한 기억은 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참석하기 시작 교회에서 나는 성가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대단한 신앙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또래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동갑인 친구들이야 학교에서도 만날 수 있고, 동창들도 많았지만, 비슷한 나잇대지만 연령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당시, 우리를 지도했던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은 "성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의로 스물일곱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수능을 보고 대학교에 입학한 분으로 음악적 완벽성에 대한 욕심이 있으신 분이셨다. 모름지기, 신앙적 행위라는 것은 행위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진심"과 "경건"이 중요한 것이라지만, 그 선생님께서는 다 합쳐서 교인이 천명도 되지 않는 중소 교회에 중고등부 성가대인 우리에게 그저 "마음을 담긴 찬양"만을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음정의 정확성과 올바른 발성을 요구하셨다. 생업과 학업을 병행하는 분주한 삶 속에서도 봉사직인 "성가대 지휘자"까지 맡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시간을 들여 성가대 학생들에게 따로 발성 레슨을 해줄 정도이니 그 마음만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렇게 음악적 욕심이 컸던 그가 온 맘과 열정을 다 쏟아붓고 싶은 프로그램을 드디어 맡게 되었으니, 바로 성탄절을 앞두고 열리는 행사에서 중고등부가 칸타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칸타타라니. 신앙심과 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그가 얼마나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났겠는가. 지휘자도 교인, 반주자도 교인 (피아노 전공으로 예대 진학을 준비하는 친구였다), 성가대 단원들도 다 교인으로 철저하게 무급 봉사직, 자급자족의 원리로 운영되던 성가대에 외부 인사를 섭외해온 것이다. 초빙돼서 온 반주자는 지휘자와 동대학교에 재학 중이 피아노 전공자였다. 페이가 얼마나 지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교회에서 중고등부 성가대에게 페이를 지급한 최초의 사례였다.


사실 반주자는 이십 대 초반의 여성으로 우리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다. 그냥 원래 우리 반주자가 해도 되는데 굳이 초빙해왔어야 했나는 생각이 지금은 들지만, 그 당시에는 낯선 사람이 - 무려 피아노 전공 대학생이! - 우리와 함께 연습을 한다는 것이 우리를 들뜨게 했다. "대학생"과 "전공자"라는 그녀의 타이틀이 우리에게 일종의 신비감 같은 것을 주었던 것 같다.


삼 개월 동안 여러 번의 연습을 함께했지만, 그녀와 친해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지휘자의 말과 요구에 응해 연주를 할 뿐, 우리와 교류를 하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쉬는 시간에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핸드폰만 만질 뿐이었다. 간식시간에는 우리는 그녀의 몫까지 간식을 챙겨 피아노 쪽으로 가져다주긴 했지만, 지휘자를 제외하고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그녀에게 우리도 점점 무심해졌다.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나는 친구들과 소보루빵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잠시 화장실에 갔었던 한 학년 선배인 A가 눈에 띄게 경직된 얼굴로 돌아왔다.


"언니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화장실 갔다 오는데 반주자가 친구랑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


"근데요?"


"근데 친구랑 통화하는데 우리 얘기를 하면서 막 비웃으면서 욕하는 거야. 음정도 자꾸 떨어지고 실수해서 노래 못 들어주겠다고. 반주하는데 괴롭다고."


뭐라고 했다고요? (출처: 무한도전)


"네?????? 언니 들으라고 그렇게 말한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냥 누가 있는지 모르고 한 말이겠지."


"그래요? 그럼 저희도 막 가서 욕할까요? 반주 별로라고? 다 틀린다고?!"


"아니.... 그러면 똑같은 사람 되잖아."


그 말을 하고도 한동안 계속 들썩이는 언니의 어깨를 보면서 나는 언니가 화를 누르느라 애쓰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괜찮아져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언니는 온 힘을 다해서 참고 있었다.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 일은 나에게 일종의 "에피파니"의 순간이었다. 많은 청소년들이 그렇듯, 나는 그전까지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억울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굳이 내세워서 주변에 말을 하지 않았을 뿐 학창 시절 나에 대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 친구도 있었고,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가 했다는 말을 듣고 사실관계도 파악하지 않고 내 신발 가방을 바닥에 던져버려 나를 황당케 한 친구도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를 나도 좋아한다고 의심하며 - 참고로, 안 좋아했다 - 갑자기 나를 따돌렸던 친구도 있었다. 같은 반 남학생이 내 사물함을 치고 가길래, 나도 똑같이 그 아이의 사물함을 쳤다가 따귀를 맞은 경험도 있었다 - 남자에게 맞은 것도, 따귀를 맞은 것도 그때가 유일했다.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단 한 번도 "누가 나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다. 그냥 누가 나를 싫어하면 나도 그 아이를 굳이 좋게 보려 하지 않았었고, 누가 나를 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그러는지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게"라고 말을 하며 그 아이의 험담을 했었다. 험담을 하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불편함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는 "상대가 먼저 시작했으니까"라는 아주 편리한 근거가 있었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 같이 느껴졌고 그래서 그렇게 쉽게, A에게 "우리도 가서 욕해주자"는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에 따라온 A의 말은 그 편리한 근거를 단숨에 무너뜨려 다시금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 겪은 '에피파니'의 순간이었다.




그녀가 애써 화를 누르며 했던 한 문장. 눈에는 아직도 노기가 서려있었지만, 온 힘을 다해 지키고자 한 그 한 문장을 나는 며칠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침묵과 감내를 선택한 그녀의 행동을 보니, 이전까지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보였던 상응보복법이 더 이상 나에게 유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그녀에게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는데 나와 1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 사람은 나보다, 아니 그 대학생 반주자보다, 어쩌면 그곳에 있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어른스러웠다. 그녀의 말이 어찌나 뇌리에 강하게 남았는지, 그 에피파니가 어찌나 강력했는지, 그것은 나의 삶의 원칙이 되어 수많은 비행과 공허한 복수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금까지 지켜주고 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무한도전)


본인의 유익을 위해 나를 이용하는 사람들, 나를 위해주는 듯한 말로 은근히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 거짓말로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 타인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분노를 길게 품지 않는다. 그리고 똑같은 비참함과 곤란함을 겪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그냥 뒤통수 맞고 마는 호구의 삶을 기꺼이 선택한다.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호구가 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손해 보는 게 남는 것이고, 양보하는 게 편하다고 자기 최면성 주문을 외우며 살지만, 십여 년을 그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지칠 때도 있다. 나의 친절과 관용을 인정해주고 고맙게 생각해주는 사람보다 당연시 여기거나 도리어 적극적으로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너진다.


측근들조차도 "참 피곤하게 산다"는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출처: 무한도전)


또 매 순간 신념을 지킨다는 것을 매우 어렵고 외로운 일이어서 종종 사람들로부터 - 심지어 측근들조차도 -  "뭘 그렇게 어렵게 사냐?"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다들 이 정도의 불의는 행하며 산다고. 너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라고. 이런 말을 들으면 오래 지켜온 신념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싶을 때가 있다. 똑같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치여 그냥 똑같은 사람이 돼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 나는 "같아지기를 거부하는 마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어떤 사람과 같아지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은 뭘까.

불의에 불의로 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피해를 입었음에도 나는 다르게 살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일에 이토록 괴로워하며 고민을 하면서까지 똑같아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동기는 무엇일까.


A. 나의 소신에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B. 나는 죄의식도 없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저 사람과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싶은 것일까?

C. 타인의 비도덕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나는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야 타당하기 때문일까?


보기를 만들어가며 하나하나 따져보았지만, 어느 하나 시원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A인 것 같다가도 C 때문인 것 같았고, A와 C 둘 다 인 것 같기도 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B 때문인 거 아니야?" 하는 물음이 나오기도 했다.  나의 이런 고민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자, 친언니가 나에게 한 단어로 답했다.


"자존감"


그것 역시 에피파니였다. 언니는 그 단어를 말한 이후로 따로 부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자존감과 내가 가진 철학적 고민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지만 그 한 단어를 듣자마자 모든 것을 설명되었고 뒤죽박죽 했던 생각이 순식간에 질서를 찾아갔다.


나라는 존재가 소중하기 때문에, 차마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끔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것.

나를 존중하기에 부정(不正)에 가담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좌시할 수만은 없는 것

그릇됨을 인식하고도 그 일을 그대로 인습하는 모순에 빠지도록 스스로를 방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랜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불의한 사람과 같아지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냥 피곤하게 살게요 (출처:Unsplash)


안타깝게도, 며칠 전에도 나는 누군가로부터 "참 피곤하게 산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배려해주고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넘어가 줘 봤자 너만 손해라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불의하고 적당히 간사해야 성공한다고.

정도를 지키는 것보다 때로는 꼼수를 부려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다행스럽게도 다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확신에 찬 대답을 내 손에 쥐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나는 갖고 있었기에 나를 걱정하며 한숨을 폭폭 쉬는 그를 보며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저도 이렇게 사는 제가 가끔 피곤하고 힘에 부치는데요.
그냥 어렵게 살려고요.
전 그냥 어렵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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