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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ul 26. 2023

비록 만선은 아닐지언정 나름 만족은 끌어올린, <밀수>

작지만 강력한 BIG 4의 1번 주자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팬데믹의 관성을 차치하더라도, OTT의 득세와 요금 인상이라는 자충수로 극장의 위상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성수기를 꼽아본다면 여전히 정월과 추석의 명절 연휴, 그리고 여름과 겨울의 방학 시즌이리라. 봄과 가을에는 신파와 코미디로, 여름과 겨울에는 거대한 스케일의 블록버스터로. 메이저 배급사들은 하이 리턴을 꿈꾸며 하나둘 제각각의 카드들을 내놓는다. 작년 여름에는 NEW가 불참했기 때문일까. 올해는 감독과 배우들의 네임 밸류만으로도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밀수>를 손에 든 NEW가 제일 먼저 여름 대전의 시작을 알렸다.


사실 올해의 BIG 4라고 불리는 NEW의 <밀수>, 쇼박스의 <비공식작전>, CJ ENM의 <더 문>, 마지막으로 롯데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중에서 <밀수>는 가장 규모가 작은 작품이다. 하나는 저 멀리 레바논이 배경이고, 또 하나는 서울을 몽땅 무너뜨렸으며, 다른 하나는 아예 달까지 날아갔을 정도니, 바닷가 마을 뒤편의 해프닝이 다소 소박해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다. 물론 무대의 크기가 재미의 크기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롤랜드 애머리히의 영화들만 보면 오히려 스케일과 재미가 반비례한다고까지 생각되니 말이다. 단지 여름 ‘대’작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밀수>가 올해 BIG 4 중 상대적으로 자그맣더라는 이야기다.



작중 춘자(김혜수)의 대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밀수>는 넓게 퍼지기보다는 깊게 들여다보는 영화인 듯했다. 화학공장으로 인한 해양오염, 이어지는 해녀들의 생계 곤란, 예기치 못한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 등 걸고자 하면 얼마든지 닻을 내려 다룰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영화는 풍년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해양 다큐멘터리도 눈물의 휴먼 드라마도 아니었기 때문일까. 영화는 그 모두를 어디까지나 배경으로서만 제시할 뿐, 하나하나에 시간을 할애하며 턱턱 멈춰 서지 않았다. 덕분에 이야기가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산만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재빠른 전개 속에서 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거의 배우의 표정 하나에 맡겨버린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움도 남았다.


진숙(염정아)이 교도소에서 차갑도록 감정에 빠져들 때까지, 시간이 흘러 서울에서의 춘자가 등장할 때까지, 아니 군천에서 두 사람이 재회한 직후까지만 해도, 나는 영화가 두 인물 사이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 것이라 생각했다. 자매 같았던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자매 같았던 나를 그 정도밖에 못 믿었던 건지. 구태여 초반에 다루지 않았던 상실과 원망의 감정을 이제야 풀고 나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들 저런들 <밀수>는 여름 성수기에 뛰어든 배급사의 대표 주자였고, 필시 사람들은 <러스트 앤 본>보다 <도둑들>의 길을 반겼을 것이다. 때문에 둘의 이야기는 소위 워맨스라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이후 영화는 권 상사(조인성), 장도리(박정민), 이 계장(김종수)이 대립하는 일종의 범죄 액션극으로 흘러갔다.



영화의 중후반 호텔에서 벌어지는 권 상사와 장도리의 충돌은 애꾸(정도원)의 기술과 속도, 또 권 상사의 카리스마적 표정 덕분에 최근 한국 영화 중 으뜸이라고 느껴졌지만, 동시에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꽤나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구태여 무거운 이야기들을 피하고 복고풍을 집어넣어 발랄한 기조를 이어왔으면서, 왜 갑작스레 저들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관계로 만들었을까. 왜 갑자기 작품의 수위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이전부터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위치에 도취되어 이따금 감정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유리잔을 씹어먹고, 부하들을 끌어모으고. 그런데 그렇다 한들 과연 저 정도까지 갈 일이었을까? 서로의 야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나 단숨에 폭발할 수 있었을까. 혹시 코미디의 일환으로 현장 처리도 제대로 안 해 “누가 마지막에 나왔어?” 같은 대사나 치기 위해 싸웠던 건가? 권 상사는 밀수 오야붕이라면서 이렇게 쉽게 퇴장할 정도의 캐릭터였나.



당연하겠지만 여름철 텐트폴 영화인 <밀수>에, 두 여성의 관계를 조금 더 세밀하게 다뤄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잠시 혹시나 하며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저 이야기가 매끄럽게만 흘러가도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무엇이 불안했던 걸까.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것도 모자라 악역에 악역에 악역을 더해가며 영화는 점점 더 얇아졌고, 전복은 피했을지언정 기어이 파도에 휘청이고 말았다. 충분히 깊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애매한 영역 속에서 영화는 홀로 흔들리며 유쾌함을 잃어갔다. 혹평을 너무 길게 한 것 같지만, 영화 자체는 딱히 나쁘지 않았다. 무난하고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오락영화였다. 수중에서의 움직임은 아름다웠고, 김원해 배우와 윤경호 배우 등의 출연은 반가웠다.


단지 계속되는 반복에 이 계장의 이중성도 장도리의 야망 어린 광기도 퇴색되었고, 결국은 그들의 최후조차 상어라는 편의적 장치에 의존한 점이 찝찝함으로 남아 버렸다. 극장은 시원한데 영화는 시원하지 못하다니. 호텔 액션은 너무 좋았지만 작품의 색과 어울리지 못했고, 인물 간의 관계는 얼렁뚱땅 반전으로 뒤집혔으니 곱씹어 보면 어디선가 아쉬움이 자꾸만 쌓여간다. 그럼에도 영화에 나름 만족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김추자 선생님의 ‘무인도’가 흘러나와 나도 몰래 그 음악에 빠져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밀수>의 가장 큰 재미는 정겨운 삽입곡들이었는데, 이 정도면 선곡에 있어서는 거의 코리안 제임스 건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마지막 어선 위에서 성별의 대립이 그려지는데, 굳이 그쪽으로만 해석하지 않더라도 서로 간의 신뢰를 회복한 사람들과 끝까지 누구도 믿지 않은 사람들의 대립으로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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