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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ug 13. 2023

낙원을 무너뜨린 이타적 이기주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올여름의 승자로 우뚝 설 BIG 4의 4번 주자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내게 있어 지옥이란, 죄인들이 가는 곳도 악마들이 사는 곳도 아닌, 어떠한 이유에서든 당장 벗어나고 싶은 공간을 의미한다. 이유도 모른 채 혼나야만 했던 초등학교 수련회가 내게는 지옥이었고, 술 한 잔도 못 하는데 끌려갔던 회식 자리 역시 나에게는 꽤나 깊은 지옥이었다. 물론 나의 지옥이 다른 이에게는 일상일 수도, 어쩌면 그 이상의 극락일 수도 있기에, 지옥의 정의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분히 상대적이리라.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 지옥이라 부를 곳이 있다면, 모든 것이 무너진 재난의 소용돌이 바로 그 한가운데가 아닐까. 하고 싶은 일도, 해주고 싶은 일도, 심지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더러운 일조차도.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곳이,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깊은 나락이다.


그런 내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보여준 지옥도는, 재난 영화의 틀마저 무너트린 나락의 밑바닥이었다. 우리가 알던 서울의 마천루는 땅으로 내려앉아 돌덩이로 전락했고, 먼지와 연기에 빛깔을 잡아먹혀 잿빛의 풍경만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문명의 증거물로 홀로 남은 황궁 아파트마저 쓰러져 없었더라면, 필시 그곳이 서울이라 알면서도 쉽사리 인정하지는 못했으리라. 물론 솟구치는 땅과 폐허가 된 도시라면 영화 <2012>나 <샌 안드레아스> 등의 선례가 있듯, 이미지만으로는 이 영화가 재난 영화를 뛰어넘었다 말하기에 부족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속 생존자 중 하나가 되어 나를 가둔 콘크리트 잔해들을 바라봐보자. 어디까지고 이어진 재앙 너머에 과연 희망이 있기는 할지, 언젠가 이 지옥에도 끝이 오기는 할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미지의 불안감은 그 어떤 이미지보다도 무겁게 우리의 허파를 쥐어짰다.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찬란했던 과거라도 추억하며 절망을 덜어내 보라는 걸까. 장난처럼 남겨놓은 한 채의 아파트는 일견 폐허 속의 낙원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하나 남은 문명을 좇아 너도나도 홀린 듯이 아파트로 모여왔고, 그 이름도 위대한 황궁(皇宮) 아파트는 순식간에 공중(公衆) 대피소로 변해있었다. 물론 황궁이라 할 만큼의 안락함도 따스함도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았으리라. 한순간에 집을 잃은 그들에게는 그저 돌아갈 곳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두를 품어주기에 고작 한 동짜리 아파트는 너무나 협소했고, 결국 계단이며 복도며 현관 앞 길바닥까지 떠밀려온 사람들로 대피소는 포화상태였다. 그래도 폐허가 아니라는 안도감에 당장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겠지만, 실상 전기와 수도가 끊긴 아파트는 유명무실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무엇이 사람을 인간으로 만들었고, 무엇이 세상 위에 사회를 이룩했을까. 나는 그것을 법률이나 규범, 약속과 같이 보이지는 않더라도 당연히 있다 여겨지는 일종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 무엇도 우리의 자유로운 본능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그 위태로운 자연 상태에서 대체 누가 여유로이 안심하며 잠들 수나 있을까. 누군가가 나를 시기하고 불신하며 혐오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자는 틈에 내게로 와 칼을 꽂을지도 모르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표현하자면, 누가 언제 내 식량과 내 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건물과 함께 법률은 붕괴했고, 간신히 유지되던 규범마저 금이 가 흔들리고 있었다. 더 이상 사회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그곳에 우리를 잡아주고 보호해 줄 시스템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피소라 생각했던 아파트는 점차 생존을 경쟁하는 투기장이 되어갔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이기적이 되어야만 했다.



숨기고, 다투고, 빼앗고. 황궁 아파트에서도 지옥의 모습들이 솟아났지만, 사람들은 애써 무시한 채 그 속에서 매일을 반복했다. 그야 떠난다고 한들 시멘트로 덮인 황야에는 목표조차 없었으니까. 낙원은커녕 대피소조차 아니었던, 오히려 수용소나 다름없던 콘크리트 속에서 사람들은 불신과 불안에 잠식되어 하루하루 피폐해져 갔다. 그렇게 자라나던 이기심이 드디어 목표치에 다다랐던 걸까. 마침내 폭발한 집주인과 불청객의 갈등은 작품 속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비로소 콘크리트 위에 유토피아의 싹을 틔워 냈다. 집을 놓고 벌어진 충돌 속에서 그들은 부탁하고 이해하는 대화의 길 대신, 칼을 들고 불을 내는 폭력의 길을 택했다. 왜? 내가 건넨 손을 상대가 잡아줄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빼앗아 쟁취하는 쪽이 분명 더 빠른 길일 테니까. 타오르는 불신은 화마가 되어 아파트를 위협했고, 지켜보는 모두의 마음속에 공포로서 번져갔다.


갑작스러운 사태 앞에 나도 몰래 굳어버린 걸까, 혹 내 집이 아니기에 관망하고 있던 걸까. 누구 한 명 앞장서서 나서지를 않던 와중, 오직 영탁(이병헌)만이 망설임 없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작품 속 다른 주민의 말처럼 집 몇 채가 타버린다 해서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 어쩌면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진화 작업에 필사적이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일 내가 옆집에 혹은 윗집에 살았더라면, 나에게만큼은 그것이 아파트의 전소와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불신이 쌓여가고 공포에 빠져가면서도 문명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아직도 위험을 남의 일로 여기는 듯 보였다. 영탁의 등장과 금애(김선영)의 일갈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더 큰 위험이 자신에게 닥쳐오기 전까지 마음속의 공포를 직시하지 않았으리라.



우리도 한번 황궁 아파트의 주민이 되어, 당면한 문제들에 하나씩 답해보자. 우선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외부인을 믿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일까? 그러면 주소라도 알 수 있는 주민끼리 뭉쳐보자. 그런데 이웃이라 한다고 모두 믿을 수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법이라는 브레이크를 세워 충돌을 한번 막아보자. 그럼 법은 누가 제정하며 벌은 누가 집행할까? 우리들의 대표를 뽑아 그에게 권한을 일임하자.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민성(박서준)의 조언에 따라 주민대표를 축으로 하는 기초적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대표가 된 영탁을 시작으로 주민들에게 하나씩 아파트에서의 역할이 부여되었다. 외부인을 몰아내고, 단지 내를 정비하고, 사회라는 유기체를 부활시킨 중심에는 모두 영탁이 있었기에, 그를 향한 주민들의 충성과 믿음은 나날이 높아지기 일쑤였다. 마치 대지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어쩌면 이전보다 더 공평하고 인간답게 느껴지던 그곳은 그렇게 진정한 황궁이자 낙원이 되어갔다.


하지만 빛이 밝아질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듯이, 승승장구하던 낙원의 뒤뜰에서 어긋남은 가만하게 이기심을 키워갔다. 낙원의 주민으로서 시스템에 기여해 은총을 내려받고 있었음에도, 대체 무엇이 그리 불만이었으며 무엇이 그리도 부족했을까. 규칙을 어겨가며 외부인을 숨겨주고, 우리의 자원을 저들에게 소비하고. 기어이는 반동마저 일으키며 낙원의 질서까지 위협하고 말았다. 명화(박보영)에 도균(김도윤), 그 외에도 몇몇 있던 규칙 위반자들까지. 시스템을 거스르며 자신만의 도덕관을 내세우고 싶었다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따르지 말고 떠났으면 될 일이다. 그래, 물론 이해한다. 낙원의 안락함을 놓고 싶지 않았겠지.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내 주장도 외쳐대고 싶었겠지. 다 같이 잘 살자며 ‘모두’라는 허상을 등에 업고, 나만큼은 선하고 양심적이라 자위하고 싶었겠지. 어쩌면 스스로 자비롭기까지 하다 자만하며 자화자찬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잠시 다시 한번 낙원을 되돌아보자. 온 세상이 무너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무대로 삼으면서, 이 정도로 인간성이 유지되던 곳은 결코 찾기 쉽지 않다. 외부와의 마찰에서 누구 한 명 총알받이로 내몰리지 않았었고, 내부의 반역자들 역시 도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신체적인 폭력으로 벌을 받지 아니했다. 심지어 이러한 장르에서 흔히 채택되는 성적인 착취와 대상화마저 배제되었으니, 황궁 아파트는 근대를 넘어 가히 현대적 인간성이 유지되던 공간이라 하여도 일절 부족함이 없으리라.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당연 영탁의 존재 덕분이다. 그가 대표로서 주민들을 가족으로 여겼기에, 혈연을 뛰어넘어 황궁의 사람들은 실재하는 ‘모두’로서 하나 될 수 있었다. 내 손에 닿아 내 품에 안고 지켜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가족이며, 그것이 곧 우리만의 모두가 아니겠는가.


애석하게도 영화는 끝내 영탁이 아니라 명화의 손을 들어주었다. 영원해야 했던 시스템은 무뢰한의 손에 의해 다시금 조각나 무너졌고, 낙원이었던 아파트는 지옥으로 돌아가며 칸칸이 붉게 물들었다. 영탁의 지시 아래 주민들이 하나로 뭉쳤더라면, 덮쳐오는 안팎의 분란들도 슬기롭게 헤쳐나갔을지 모르는데. 명화를 비롯한 반대파가 무너트린 건 바리케이드보다 무거운 규칙과 신뢰의 벽이었다. 사람이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양심조차 잃어버린 인면수심의 악마냐고. 목이 갈라져라 소리치던 그들의 모습은 내게도 또렷하게 이타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외침이 무엇을 초래했나 떠올리며 그들의 행적을 되짚어보면, 이타심조차 결국 이기심의 발현이었음에 쉬이 고개를 가로젓지는 못할 것이다.



그 비극을 감내하면서까지 명화를 선택했기에, 영화는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무너진 빌딩 속에서도 희망이 자라났음을, 진실로 이타적인 사람들이 아직 곁에 남아있음을. 하지만 황궁 아파트가 낙원이었던 이유는 단지 그곳이 재난을 겪고도 멀쩡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시스템이 세워졌고 질서가 바로잡혔기에, 비로소 낙원의 씨는 꽃이 되어 피어날 수 있던 것이다.


명화를 맞이한 공동체가 어찌 유지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적을 막아줄 벽도 구성원을 관리할 리더도 없이 그들은 언제까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필연적으로 찾아올 자원의 고갈을 앞에 두고도 지금처럼 여유를 지켜낼 수 있겠는가. 이전까지의 잿빛 화면에서 벗어나 따스한 색채가 돋보이던 희망적 결말이었지만, 영탁과의 대비를 위해 너무 과한 판타지를 끌어온 점은 소소한 옥에 티로 남고 말았다.


다소 도식적인 결말에 치여 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무너져 내렸으나, 그럼에도 한국 영화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성취들이 있었기에, 여러분의 낙원은 어떠할지 극장에서 보시기를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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