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에 과외선생으로 드나들면서 가장 쏠쏠한 재미는 도우미 아주머니들과 나누는 우정(?)이었다.
도우미 아주머니와 친해지면 맛있는 커피와 차는 물론이고 재벌집 뒷 이야기도 덤으로 들을 수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행주를 바쁘게 개면서 투덜거리는 아주머니께 물어봤다.
"무슨 행주가 이렇게 많아요?"
"아휴, 나도 몰라요. 냉장고에서 자기 손으로 물 한잔도 못 꺼내먹는 사람이 무슨 카페를 한다고.. 에휴.."
아줌마는 짜증을 눌러가며 대답했다.
"누가 카페를 해요?"
"사모님이요... 에휴.. 어른들 아시면 어쩌려고..."
아주머니가 설명하는 자초지종은 이랬다.
사모님은 너무너무 일이 하고 싶었다. 재벌 딸로 태어나 피아노를 공부해 예중 예고 음대를 나오고 대학 4학년 때 10살 차이 나는 또 다른 재벌 2세와 결혼한 사모님은 한 번도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피아노는 더 이상 치기 싫었다. 친정 회사나 시댁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친정과 시댁 모두 보수적 가풍을 가지고 있어서 여자는 살림만 해야 한다. 그래도 사모님은 일이 너무나 하고 싶어 취미 생활에 올인하던 중 커피에 빠지셨다. 그리고 결심을 한다. 카페를 차리자! 일이 너무나 하고 싶어 눈이 뒤집힌 사모님은 친정과 시댁 남편 그리고 자식들 몰래 멀리 떨어진 지역에 조그마한 카페를 차린다. 근데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카페에서 사용한 행주를 제대로 빨지 못해 집으로 싸들고 와서 도우미 아주머니께 부탁을 했고 도우미 아주머니는 매일 팔자에도 없는 행주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짜증이 날만하다.
"재미있으시대요?"
나는 너무나 호기심이 동해서 물어봤다. 사실 20대에 여자들이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로망을 한 번쯤 가져보지 않나? 근데 그 로망을 마흔이 훌쩍 넘어 실현한 사모님의 소감이 너무 궁금했다.
"처음엔 엄청 재미있어했는데 요즘 좀 시들해요.. 얼마 전에는 자기가 건물주한테 돈 갖다 주려고 일하는 것 같다고 그러대? 이제야 세상 물정이 좀 보이는 거지.... 암튼 내가 볼 땐 3개월도 못 갈 것 같아. 700만 원짜리 봄 잠바 사 입는 사람이 한 달에 돈 100 벌려고 12시간을 서서 일하겠어요?"
그리고 6개월 후 사모님은 카페를 접었고 아주머니는 행주 지옥에서 벗어났다.
사모님은 뭐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남산만 한 배를 하고 출산 예정일 일주일 전까지 이 집 저 집 다니며 수업을 했다. 첫째 때도 그랬고 둘째 때도 그랬다. 배가 불러 일을 다니는 게 서글프기도 하고 가끔은 민망하기도 했지만 대입과 고입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에게 나의 배 사이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둘째 예정일이 한 달쯤 남았을때 아파트 주차장에서 지현이(가명) 어머니와 마주쳤다. 나는 낑낑대며 차에서 내리고 있었고 지현이 어머니는 쇼핑을 마치고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기사 아저씨를 보고 있었다. 나는 터질 것 같은 배를 하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큰 가방을 둘러매고 있는 내 자신이 좀 창피했다. 지현이 어머니는 나를 배려해서 그랬는지 기사 아저씨에게 짐을 달라고 하더니 손수(?) 짐을 들고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랐갔다.
엘리베이터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 힘드시죠?"
지현이 어머니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네.. 저도 집에서 애 키우고 살림하고 싶네요.."
그날 나는 내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난데없이 학부모에게 아무 말(?)이나 해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 바로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지현이 어머님이 선생님 힘드시니까 차 한잔하시면서 한숨 돌리시라며 차를 내오셨다.
"저는 선생님이 부러워요..."
거실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넘기려는데 갑자기 지현이 어머니의 고백 타임(?)이 시작되었다.
"네?"
"일 그만두지 마세요, 선생님. 지금은 애기가 어려서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버텨보세요. 시간은 결국 흘러가거든요.
한 아이를 3,4년 정도 가르치다 보면 그 아이의 어머니와 친분도 생기고 팀워크도 생긴다. 그래서 속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재벌집 사모님들은 항상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속 이야기나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나는 난데없는 지현이 어머니의 말에 당황스러웠고 놀라웠다.
"대학 졸업하고 1년 정도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어요. 결혼하고 바로 그만두었는데.. 해가 갈수록 후회스럽더라고요. 그때는 일을 그만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서울대 나오신 시어머님도 교직 생활하시다가 결혼과 동시에 그만두셨으니 저도 결혼하면 당연히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지현이 아버님이 큰 회사 운영하시려면 어머님의 내조가 필요하시잖아요.."
나는 나름 교과서적인 답을 찾아 대답했지만 진부한 대답이었다.
"선생님은 버텨 보세요. 아이 둘 키우면서 일 하시려면 지금 당장은 울고 싶겠지만.. 일을 관두시면 나중에 울고 싶어 지실 거예요. 내가 없어지잖아요. 저처럼요.."
지현이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일하러 다니는 내가 안쓰러워 위로하려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정말 진심이 그랬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이런저런 일로 삶에 치여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지현이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일이 하고 싶어 무작정 카페를 차렸던 사모님이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서글픈 지현이 어머니, 그리고 만삭의 배를 부여잡고 돌아다녔던 나는 뭘 위해 그랬던 걸까?
내 대답은...
나는 나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사모님과 지현이 어머니의 대답도 이제는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