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다른 사람들이 있다. 무리에 섞여서 여느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면서도, 언뜻 느껴지는 그들만의 아우라.
모두가 한 곳을 보면서 달리고 있는 와중 그들은 그렇게 조급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편안함이 느껴지고, 생명이 느껴지고, 즐거움이 느껴진다.
얼마 전 택시를 탔다. 아침에 급하게 어디로 가야 했는데, 마침 집 앞에 택시가 한 대 기다리고 있었다. 와! 오늘은 운이 좋았다며 이러한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요,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면서 가고 있는데, 기사님에게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퇴직한 회장님의 포스랄까, 자세도 곧고 옷 역시 단정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뚫고 나오는 아우라가 있었다.
"기사님, 기사님은 뭔가 좀 특별하신 거 같아요. 되게 따뜻한 회장님 같은 포스가 있으세요."
기사님은 웃으시면서 손님들에게 그런 얘기를 종종 듣는다고 하셨다. 특히나 디자이너처럼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는 거의 항상 듣는다고 하셨다.
나는 그 비결이 궁금했다. 혹시 다른 직업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아니면 기사라는 직업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실까? 뭐지? 이것은?
기사님은 30년이 넘게 서울에서 운전을 하신 베테랑 기사분이었고, 딱히 기사라는 직업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얘기를 하면서 아- 그렇구나, 하며 감탄사가 나온 부분이 있었다.
"혹시 취미활동이 있으세요?"
"기타를 쳐요. 손가락에 굳은살이 밸 때까지 해요.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거지. 나는 친구들이 맨날 술 먹자고 나오라고 해도 안나가...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할 틈이 어딨어요?"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햄연지'라는 분을 알게 되었다. 유명한 오뚜기 회장님의 따님인데, 사실 예전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 우연히 영상 몇 개를 보고는 금세 빠져들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댓글에 '다른 것보다 저 화목한 가정이 지금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 같다' 이렇게 얘기했지만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보였다.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돈, 다정하고 따뜻한 가족들을 다 떠난 그녀만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뮤지컬 배우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또 그 안에서 스스로 고군분투를 하는 것도 느껴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니, 오뚜기 회장님 따님이면서 뮤지컬을 왜 해?"라는 시기와 회의가 섞인 질문을 계속 받게 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밝은 웃음 뒤에는 그러한 압박감에서 오는 부담감을 이겨내고자 하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영화 '내 사랑'을 보았다. 캐나다의 한 예술가의 삶을 다룬 작품인데, 주인공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는 한 여자다. 장애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무시와 핍박을 받지만, 그녀가 보는 세상은 언제나 따뜻하다.
아니, 따뜻하기보다는 어쩌면 왜곡됨이 없는 것일 수도. 눈이 오면 하얗게 쌓인 동네를 표현해내거나, 4계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만 꼽아서 그렸다는 그림을 보면 그녀가 보는 세상이 얼마나 왜곡됨이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매일 그것을 자신의 안에서 꺼냄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했다.
햄연지님이 왜 그 영화를 좋아하는지 너무나도 이해가 됐다.
우리는 모두 '창조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 안에는 '창조의 신'이 있다. 생존이라는 1차 목표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어쩌면 그렇지 않더라도), 창조의 힘으로 이 세상을 느끼며 만끽한다. 사실 이 세상에 창조가 아닌 것이 있을까?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도,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창조에서 기반한 것인데. 모든 생명들 역시 창조물이고.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창조성을 잃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원래 있던 창조성을 나오지 못하게 꼭꼭 잠가버리는 것이다.
난 원래 창조성이 없는데, 무슨 말이에요?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난 모든 사람 안에는 '창조의 신'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 어린 시절 모래성을 지을 때를 기억해보면, 모래성이 완벽하게 지어지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막 아무렇게나 짓고 낄낄거리면서 즐거워했다. 누군가의 평가가 머릿속에 있지 않으니 그 자체로 즐거움을 만끽했다.
나는 '창조가 시작되면, 일은 놀이가 된다.'라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어떠한 것을 할 때 이것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할까? 내가 과연 내 글을 좋아할까? 등의 생각에 빠지면 창조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이 되어버린다.
그림을 그리거나, 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좀 잘 써보려고 앉으면 마음에 드는 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나를 통해 어떠한 기운이 들어와 그것이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도록 할 때에 훨씬 더 개운하게 글이 써진다.
난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조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졌었다. 먹고사는 것에 바빠서, 그곳에만 초점을 맞추니 내가 점점 시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사회가 정의하는 관념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모두가 한 곳을 보면서 달리고 있는 와중에 잠시 주변을 돌아보면 사실 목적지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냥 이 모든 과정들이 목적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사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하는 다양한 활동들 역시 창조 그 자체인 경우가 많다. 요리하는 것도, 집을 꾸미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그런데 이 모든 과정들에서 중요한 것은, '창조' 그 자체에 집중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더 나은 내 모습을 위해... 이러한 것들은 내가 표현하고 싶은 창조에 집중하면 알아서 따라오는 것이지 그것에 집중하면 창조성은 더더욱 막혀버린다.
책 아티스트 웨이에서 굉장히 영감을 받았던 구절이 있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가 있다면, 팔리든 안 팔리든 간에 그 시를 써야 한다. 나는 창조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창조해주어야 한다."
내 안의 오렌지 같이 통통 튀는 아이를 다시 싱그럽게 살려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영혼의 울림을 세상에 표현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나 자신과 누군가에게, 사실은 그렇게 힘들 필요가 없다고, 그냥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하면 된다고...얘기해주고 싶다. 누구보다도 나에게 진심으로 얘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