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세상에서 목소리 내는 법

분노는 나의 힘

by 고은아



<1편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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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미국 주정부 자동차 행정기관인 DMV에 다녀왔다. 국가 면허 교환을 신청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어서였다.


아! 이곳은 전화를 해도 안 받고 결국 찾아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곳!


DMV는 미국 내에서도 악명이 높은 곳이다. 영화 <주토피아>에서 주인공 주디(토끼)가 나무늘보 직원 앞에서 좌절하던 그 장면이 실제 현실로 존재하는 곳.


영화에서는 느릿느릿 한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현실의 '나무늘보'들은 무례함까지 장착하고 있다. 몸은 여기 있지만 영혼은 부재하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이해가 간다.)


tempImagemXDVEL.heic 영화 주토피아 중. DMV는 한국으로 치면 운전면허시험장과 차량등록소를 합쳐놓은 곳이다.



다행히도 내가 살고 있는 동네 DMV는 영혼이 몸에 있는 직원들이 몇 있었는데, 내 안의 힘을 되찾기로 결심한 바로 오늘, 우주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테스트했다.


"너 정말 네 힘을 되찾은 거 맞아?"


창구에서 만난 직원은 거대한 체구에 시들시들한 눈빛을 한, 회색빛 무표정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흑인 아주머니였다.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질문을 했다.


"안녕. 면허 교환 신청을 한 달 전에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 왔어. 혹시~"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잘라 말했다.


"60일 걸려."


?


난 신선한 무례함에 벙쩌버렸다.


그리고 내가 벙찐 사이 남편이 차 등록을 위한 질문들을 이어갔다. 남편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내 마음들은 시끄럽게 상의하기 시작했다.


'은아야! 가만히 있지 마. 네 힘을 되찾아야지.'


나는 용기 내어 다시 물었다.


"혹시 면허 교환 프로세스를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1

2

3

.

.

.


내 질문은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순간 내 목소리에 해리포터 투명 망토가 씌워졌나 했다. 아주 고요한 공기에 난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다행히 남편이 내 질문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낚아채 설탕을 한 번 덧씌워 그녀에게 보냈다.


"처리 기간이 걸리는 건 아는데, 프로세스를 확인해 볼 방법이 있을까?"


그제야 여자는 한숨을 작게 쉬고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저었다.


.



뭐지?


1차 업무가 끝나고 의자에 돌아와 앉자 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나, 여기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인데. 어찌 이토록 투명인간 취급을 할 수 있지?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오니 밖으로 나가 찬 바람을 쐬어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DMV로 돌아왔다. 2차 업무를 위해 또 기다렸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아까 만난 무례한 아주머니 옆 창구에 배정이 됐다.


남편이 새로운 직원에게 업무를 보는 동안 내 안은 또 시끄러웠다.


"아까 그렇게 대답 들었다고, 네가 궁금한 거 또 꾹 참을 거야?"


2차 업무가 마무리되고, 난 새로운 직원에게 물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아까 저분이 60일이라 하셨는데, DMV 사이트에서는 최대 30일이라고 본 것 같거든.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직원은 자신은 그 담당이 아니고 수습사원이라 잘 모른다고 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옆에 있는 상사들이 와서 같이 해결해 줬을 텐데... 한국이 너무 그리웠다. 근데 상관없었다. 난 내 의무를 다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아까 만난 무례한 직원이 나를 매섭게 바라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기가 아까 60일이라고 했는데 왜 또 묻느냐는 이유였다. 그녀의 먼지 같은 회색빛 에너지에 약간 붉은 기가 돌았다.


동시에 묘한 쾌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화를 낸다는 건, 본인의 서비스가 별로였다는 걸 증명한 셈이 되니까.


난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문밖을 당당히 나섰다.


.



개 쫄렸다.






솔직히 평소 같았으면 ‘여기는 원래 이런 DMV니까’, 혹은 ‘저 사람이 오늘 많이 피곤한가 보다’, '괜히 갈등 만들기 싫으니까' 라며 스스로를 달래고 넘어갔을 것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명목하에 나의 불편함을 꾹꾹 눌러 담는 것에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러기 싫었다.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기 전에, 그냥 온전히 내 편이 되어보고 싶었다.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게 대체 왜 잘못이란 말인가? 질문을 받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그들의 업무가 아니던가. 나는 그저 정당한 나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다


덧붙여 이것은 나만의 작은 항쟁이었다.


"저기요. 당신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지만 난 투명 인간이 아니야. 나는 내가 궁금한 것을 당당히 물어볼 권리가 있는 사람이야.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내 의사를 전달하기엔 충분하며, 나는 내 권리를 스스로 챙길 줄 알아. 백인 남편 옆에 서 있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아시아 여자가 아니라고."




세상은, 사람들은 말한다. 분노하지 말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영혼이 내지르는 가장 정직한 신호다. 그 뜨거운 불길 속에는 내가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될 존엄성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이민자로 살아가는 미국 생활은 나를 끊임없이 작아지게 만든다. 적당히 수긍하고 적응하는 것이 어쩌면 더 편한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의 분노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나, 결코 작게 살고 싶지 않아. 내 영토는 내가 지킬 거야."


오늘 내 안에서 타오른 그 불꽃을 나는 끄지 않을 거다.


이 불이 타인을 태우기 위해 휘두르는 무모한 화염이 아니라, 차가운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든든한 벽난로의 온기가 되기를 바라며.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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