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나는 내 욕구를 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충족 받아왔다. 타고난 내 성향 때문인지, 내가 원하는 것들은 타인을 통해 어느정도 주어졌고 그것이 100%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만족할 만큼은 되었다.
어떤 옷을 갖고 싶으면 누군가 비슷한 옷을 선물했고, 여행을 가고싶으면 마법처럼 기회가 열렸다. 우주는 언제나 내 편인 것만 같았고, 나는 그 '간접적인 충족'이 주는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깨달았다. 그 달콤한 축복에는 내 영혼을 서서히 잠재우는 독이 숨어 있었음을.
2025년 10월 31일,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6년 1월 13일. 이 낯선 땅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두 달 반이 흘렀다.
내 남편은 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11년을 살았기에, 이곳에선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이민자나 다름없다. 그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커리어를 완전히 틀기로 했고, 그 때문에 직업을 찾기 전까지는 돈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 역시 온라인으로 돈을 조금 벌고는 있지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었다.
시부모님은 은퇴를 맞아 LA를 떠나 버지니아에 대저택을 구매하셨다. 리모델링 전문가이신 어머니는 집을 고쳐 가치를 높이는 일을 하시는데, 우리의 상황을 보시고서는, 우리에게 이곳에서 몇 년간 같이 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모두에게 윈-윈(Win-Win)인 전략으로 보였다.
가족으로서 더 돈독해질 수 있고, 어머니에게는 일을 함께할 사람들이 생겼고, 나와 남편에게는 돈을 아끼고 리모델링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물론 월세를 낸다)
그리고 마주한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사슴 가족이 노닐고 연못이 반짝이는 동화 같은 뒷마당. 하지만 집 안은 난방과 물만 겨우 나오는 살벌한 공사판이었다.
초반에는 막노동이 이어졌다. 육체를 쓰니 생각들이 사라졌다.
또한 어머니는 내 감각을 믿어주시고 우리 방 디자인 전권을 맡겨주셨다.
내가 지낼 공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 취향대로 꾸민다는 것은 길고 고된 노동의 힘듦을 잊을 정도로 천국 같은 보상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우리는 어머니를 도와서 아주 많은 일들을 했고, 배웠다.
하지만 곧 두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1. 대저택
방만 9개인 대저택을 통째로 뜯어고치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이 느껴졌다. 인부들이 와도 일은 산더미였고, 집의 절반은 다른 세입자들을 위해, 절반은 가족들이 살 공간으로 나누는 대공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 일의 순서
어머니가 개인적인 일로 LA와 버지니아를 오가시는 탓에, 어머니가 계실 때는 새벽 1시까지 노동을 했고, 안 계실 때는 공사판 같은 집에서 방치된 채 살아야 했다.
어느 날은 정리되어 있지 않은 폐허에서 헤매는 악몽을 꿨다. 내 영혼이 이 집의 어수선한 에너지에 좀먹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얼른 우리 방부터 완성해 이 낯선 땅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었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은 함께 사용할 부엌, 거실 등을 완성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래. 함께 사는 집. 나와 남편이 지낼 간이 방도 있으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욕구를 뒤로 미뤘다. 거실이 끝나면, 부엌이 끝나면 그때는 내 욕구가 채워질 거야. 모두의 도움으로!
하지만 어머니의 작업 방식은 예상과 달랐고, 두 달이 지나도록 어느 공간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채 집은 계속 어수선했다.
그러던 중, 결국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시어머니는 '우리의 집'이라는 명분 아래 우리의 생활 방식을 조금씩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세입자'라는 생각과 어머니를 존중하는 마음에 내 행동을 바꿨지만, 남편은 참지 못했다. 둘은 크게 다투었다.
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며칠 간을 지냈다. 그리고 그 사이 내 안의 무언가도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후, 시어머니가 LA로 떠나는 날. 남편은 시머어니를 태우고 공항으로 갔다. 나는 이번에는 공항에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하고, 어머니와 포옹하며 잠시 작별했다. 감사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곧 또 만나요.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과 별개로 내 안에는 해결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고요해진 집 한구석 간이방에 홀로 앉았다. 그리고 쓰고, 쓰고, 또 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댐이 터지듯 분노가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발견했다.
"아! 나 내 욕구를 스스로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었구나."
왜? 타인들이 내 행복과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주었으니까. 내가 조금만 참으면 내 욕구는 70% 정도 채워졌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는 순간, 내 인생은 타인의 선택과 감정에 저당 잡힌 불안한 왕국이 되었다.
이를 마주한 순간, 거대한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꼭 평생 쌓아온 것만 같은 에너지였다.
폭풍이 지나가자 정신이 서늘할 정도로 맑아졌다.
나는 우리가 들어갈 방으로 들어가 청소기를 돌렸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내 의지로, 내 돈으로, 용기 있게 흥정 한끝에 할인까지 받아내며 쟁취한, 내 소중한 책상 (루시)를 낑낑거리며 끌고 왔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숲과 연못이 보이는 창가 바로 옆으로.
방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건 내 욕구를 내가 챙기기로 한 위대한 선전포고였다.
내 안에서 단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해 얻어내는 순종적인 프린세스로 살지 않겠어. 내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쟁취하는 여왕이 될 거야."
그리고 그날 오후, 나의 이 결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더 큰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