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이탈리아 국제 결혼하기 EP. 6
인생이 참 그렇다.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나를 억까하나 싶을 만큼, 되던 일도 안되고, 안 되는 일은 더 힘들게 안 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는데, 반년의 사투 끝에 드디어 거의 끝이 보인다.
처음에는 피로연도 빼고 시청 결혼식 형식만 대충 갖춰서 최대한 빠르게 끝내려고 했다. 부모님도 못 오시는 줄 알아서 '이거 뭐 내 결혼식인데 가족도 참석 못하는 결혼을 하게 생겼네...'라며 반 포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식만이라도 참석하신다고 그 먼 거리를 오기로 결정하셨다.
그 순간 제일 기뻐한 사람은 나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바로 내 약혼자였다.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엄마! 아빠! They're coming!" 이러며 나를 얼싸 앉고 하루종일 난리 부르스를 췄다.
그렇게 우리는 생의 단 한번 결혼식에 조금 더 욕심을 내기로 정했다. 집 근처 시청에서 대충 시간 때우려다가, 돈을 좀 더 얹어서 약혼자가 깜짝 프러포즈해 준 회랑 정원에서 직계 가족과 극소수의 이탈리안 친구들만 초대해서 식을 올리고 점심을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둘 다 하루 종일 파티 열 수 있는 형편도 안 됐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서 과감히 피로연은 생략했다.
결혼식 날이 가까워지는 만큼 박차를 가했다. 약혼자는 일부로 며칠의 휴가를 내서, 우리 둘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처럼 나폴리를 휘젓고 다녔다. 결혼 준비뿐만 아니라 집에 가족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급하게 온라인으로 웨딩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주문했다. 근처 몰에서 결혼반지를 사고, 예물 아닌 예물 비슷한 양쪽 부모님 선물을 사고, 편지를 쓰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집 근처 몰에 가서 약혼자 정장을 찾아 헤맸다.
그 와중에 급 다이어트한다고 하루에 한 두 끼만 먹으며 5킬로 정도 살을 뺐다.
그렇게 내 생일날이 되었다.
너무 바빠서 도저히 생일 축하할 엄두도 못 내고, 이른 아침부터 미리 온라인으로 주문해 둔 청첩장 소포를 찾아가고, 정신없이 청첩장을 돌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중국 마트에 들러 없는 것과 마찬가지던 한국 음식 몇 개를 집어 들어 어렵게 공수했다. 비가 오다 말다 하길래 준비해 둔 비옷을 입기도 애매한 날씨여서 밴쿠버에서 살 때처럼 습관적으로 비를 맞고 다녔다.
그렇게 또 다른 장소로 서둘러서 가다가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예기치 않게 차사고가 났다.
스쿠터가 쌩-하니 지나가면서 우리 차 사이드 미러를 박살 내버렸다. 다행히 우리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그 스쿠터 아저씨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내가 영어로 크게 욕하니까 다시 와서 크게 안 고장 났다고 변명하며 번호 교환을 거부했다. 나는 일단 혹시 모를 증거 수집을 위해 휴대폰을 켜서 찍으려다가, 스쿠터 아저씨가 "돈 냈잖아!"라며 얼굴 찍지 말라고 화를 냈다.
"이까짓꺼 15유로면 다 해결 돼, " 라며 약혼자에게 50유로를 주고 저 멀리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 둘 다 너무 놀랐고, 놀라는 바람에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매다가 이케아에 겨우 도착했다. 둘 다 너무 힘들었지만, 생일날 굳이 서로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 애써 좋게 생각하며 그 아저씨가 준 돈으로 저녁을 대충 때웠다. 유독 아침부터 뭐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게 없던 것 같은 날이었다.
어쨌거나 일단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 한 우리는 사이드 미러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약혼자 가족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우리 가족은 해결이 된 일이면 듣고 넘기는 편이라, 우수갯소리처럼 가볍게 얘기했다가 오히려 가족의 걱정과 화를 더 돋우는 일이 돼버렸다. 아버님께서 다음에는 절대로 그러지 말라며 이탈리아에서 사고 났을 때 상대방 얼굴 찍으면 굉장히 위험하다고 하다고 당부하셨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약혼자가 변명하던 와중 그전 얘기까지 털어놓게 되었고, 그렇게 그는 그의 가족과 여느 이탈리안 사람들처럼 격정적으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필 또 내 생일이어서 생일 축하도 아직 못한 우리는 가족에서까지 질타를 받게 되자 더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약혼자 가족에게 몇 년 동안 묵힌 얘기까지 꺼내며 난생처음으로 "저 너무 서운해요~~~ 저 좀 더 믿어주세요~~~"라며 대들었다. 그러고 나선 둘 다 진이 빠져서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렸다.
그 옆 휴대폰에는 약혼자의 가족으로부터 읽지 못한 메시지가 떴다.
'우리는 널 사랑해. 다음에 얼굴 보고 얘기하자.'
창 밖 천둥번개 소리에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깊게 잠에 빠져버렸다.
다음 날 아침. 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너희 결혼 허가 났으니까, 직접 와서 소렌토에 접수해야 할 문서와 세금 스탬프(Marca da bollo)를 들고 와."
그렇게 캐나다에서부터 내 서류를 준비해서, 이탈리아 오자마자 공증을 받고, 도청에 가서 또 공증을 받고, 시청에서 또다시 공증을 받고 나서야 드디어 결혼 공표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결혼 공표(Pubblicazioni di Matrimonio)란? 시청에서 결혼할 예정인 커플의 정보 및 계획을 최소 8일 동안 공공장소 (보통 시청의 게시판)를 공개하여, 결혼에 법적인 이의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기간 동안 누구든지 결혼에 이의 (예를 들어, 중혼, 근친, 강제나 속임수 등)가 있을 경우 이를 시청에 알릴 수 있다. 공표 기간 동안 이의가 제기되지 않으면 시청에서 결혼 허가가 내려진다. 이 허가는 결혼 공표 후 6개월 동안 유효하다.
하필 전 날 비 맞고 돌아다니다가 열감기까지 걸려 버려서 도저히 직접 갈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덜 아픈 약혼자가 힘든 몸을 이끌고 시청에 가서 공증을 받아왔는데...
이 놈의 망할 직원이 정말 끝까지 일을 개떡 같이 해버리는 게 아닌가.
다른 건 다 잘 적어놓고 내 시민권 신분을 한국인으로 적어버렸다. 나는 한국 신분이 말소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대로 그냥 넘겼다가는 나중에 체류 거주증 신청할 때 신분 불일치로 추방당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외국인으로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는 부담이 있는 나에겐 너무 큰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대신 불쌍한 약혼자를 쪼아댔다.
듣고 또 듣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약혼자가 처음으로 자기 밥 좀 먹게 그만하라고 정색을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밥도 못 먹고, 비를 또 쫄딱 맞고 와서 춥고 머리가 지끈 거리는 상태여서 더 이상 문제 해결 할 정신이 없었다고 털어놨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 둘 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이미 한계치를 벗어난 상태여서 대화할 상태가 전혀 안 됐다.
그렇게 우린 정신없는 상태에서 서로를 힐난하는 대신에 침묵을 지켰다. 약혼자는 집안일 마저 마무리하고 씻고 나서 "나 아파서 먼저 잘게"라며 방으로 홀연히 들어가 버렸다. 나는 나대로 서러워서 맘 편히 울지도 못하고 온갖 비극적 결말을 다 상상하며 울다가 일하다가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새벽을 꼬박 새웠다.
그렇게 나는 동틀 무렵 잠에 들기 위해 침대로 향했고, 내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깬 약혼자는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아직 뾰로통- 삐져있었다.
서로의 형체만 언뜻 보일 거무스룩한 무렵, 우리는 서로 지긋이 쳐다보다가 문득 약혼자가 자고 일어났는데도 평소보다 힘들어하는 게 눈에 띄었다.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나는 헐레벌떡 수건에 찬물을 적셔 이마에 올려두고, 왜 이지경이 될 때까지 미리 얘기를 안 했냐고 또 볼멘소리를 얹었다.
그러자 약혼자는 내가 집에서 쉬는 동안, 밖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서럽게 토해내기 시작했고, 그걸 듣고 있다가 우리 둘 다 누가 먼 저랄 것 없이 "내가 더 미안해..."라며 바보 같이 울면서 서로를 꼭 끌어안아줬다.
이런 게 전우애란 걸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미스터리인 것 같다.
도대체 우리네 부모님은 우리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에 이걸 다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경외감이 들 정도이다. 거기다 애까지 키우고 지금은 노년을 준비하고 계시니, 그 오랜 시간을 버텨내신 거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싶다.
옛말에 왜 늙은이의 삶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얘기를 했는지 요즘따라 처절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 나이를 먹으면 덜 괴로울까 물어봤을 때, 그 많은 동네 어른들이 복잡한 표정을 하며 지안을 지긋이 바라봤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마치 게임에서 레벨 업하는 것처럼 무언가 겨우 해내면 더 큰 문제가 닥치고,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통을 버티는 힘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모든 걸 나 혼자 외딴 타지에서 견디라고 했으면 옛 저녁에 도망갔을 것 같다. 지켜내야 할 사람이 있고, 그리고 그가 나보다도 더 힘들게 버티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받쳐내서 견디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항상 내 옆에 있는 그에게 참 고맙고 미안하다.
그는 내가 잠든 와중에 아침 댓바람부터 시청에 가서 서류 정정을 하고, 다른 결혼 준비도 마무리하고, 미뤄뒀던 집안일도 하고, 또다시 내일의 힘든 싸움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나도 이 글을 마무리하고 다시 전쟁터에 나갈 준비를 얼른 해야 한다. 바로 결혼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주 체류증"을 준비하기 위해서...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