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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Nov 14. 2024

깊은 겨울의 끝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마음 깊이 축하하며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다. 이런 눈보라는 처음이다. 서울 거리에 무릎까지 눈이 쌓이는 광경을 한차례 보았지만 이만큼의 밀도로 허공을 채우지는 않았다.*


세상을 하얗게 지워버릴 정도로 비현실적인 흰 눈이 내려올 때 사람들은 시공간을 모두 잊은 채로 바라보곤 합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차갑고 적대적이며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그것을요. 당신의 글을 읽으며 한동안 저도 폭설 속에서 살았고, 그 환영과 함께 며칠을 지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저의 겨울 풍경은 앞으로 조금은 더 천천히 기록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눈이 내릴 때마다 시를 닮은 당신의 문장들을 다시 펼치며 살아갈 수도 있겠네요.


12월 13일, 제가 태어난 이 날은 유독 온 세상이 하얀 색으로 뒤덮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눈이 오는 제 생일날 "겨울아이, 생일 축하해"라고 말을 건네며 다정한 포옹을 해주시는 부모님이 그 기억의 중심에 있는데요. 저를 축복하기 위해 하늘에서도 눈이 온다며 다정한 연락을 주는 사람들 속에서 돌이켜보면 저는 참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눈 오는 풍경이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분명 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설렌 채 뛰어나갔던, 겨울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아이였는데 말이죠. 생각해 보니 언젠가부터 제게 있어 눈은 환희에 찬 순간의 무언가라기보다는 잠깐 멈춰야만 지켜볼 수 있는 고요한 것. 찰나의 순간에 눈에 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잿빛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런 멀어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 속에서 아름답게 융화되기보다는 세상을 잠시 얼어붙게 해서 고립시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그래서였을까요. 눈을 사라질 아름다움이라 표현한 문장을 읽고 든 낯선 슬픔에 멈춰있던 것은요.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당신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한겨울 속에서만 사는 사람처럼, 눈의 모양을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까. 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수반되는 감정은 짙은 그리움의 정서이기도 합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는다고 하던데, 눈 오는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유독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풍경들이 가장 많습니다. 차 안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집 안에서. 그들에게 안겼던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 풍경만은 남아 지금의 저를 이루었습니다. 눈을 두 덩이 커다랗게 뭉친 뒤 나뭇가지로 눈코입까지 붙이자 제법 그럴 듯 했던 눈사람의 모습, 올라프 같다며 참 많이 웃었던 기억도 납니다. 어쨌든 참 서정적이고 포근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드니 다행입니다. 꽃의 낙화만큼 지켜봐주는 이들이 흔치는 않은 눈의 흩날림. 그걸 함께 목격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움은 몽환적인 풍경이 되고 결국엔 아름다움으로 귀결된다는 걸, 당신으로 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사라진 것들을 마음에 아프게 품는 사람들이 예술가가 된다고 하던데, 그렇게 마음 속 풍경을 꺼내 그리면 상념들은 더 짙어지는지 흐려지는지. 저에게도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의 책 4권을 연달아 읽으며 참 많이 앓았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길을 잃은 인물들의 황량한 정서가 내 것이 되었기 때문이죠. 무결한 설원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조금씩 얼룩지게 만드는 게 우리 인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산다는 건 대체 뭘까요. 인생을 건너가면 저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굳게 믿었던 무언가가 끊어져버린 걸 느낄 때, 노력과 정확히 반비례하여 작아진 내 모습을 느낄 때, 사랑하고 몰입할 만한 존재가 곁에서 사라졌을 때. 그럴 때 저를 흔들어 놓는 생의 의문들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 누구에게나 여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슬픔을 번지게 하기 싫어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순간도요. 보통의 사람은 차마 언어화할 수 없는 그 눈물들을 정면으로 마주해 써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문장들 가운데서 보이는 듯 했습니다.


사실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기 전엔 당신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마음을 아리게 만드는 슬픈 이야기들을 찾곤 하기에 우리는 언젠가 꼭 만나게 될 운명이었겠지요. 어딘가에 묻혀있던 폐허 속 상흔까지 꺼내 배우는 마음으로 읽었던 건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과정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 슬픔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려낸 인물들은 두 개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잃어버리기 전에 살아갔던 시간, 잃어버린 후에 살아내는 시간. 눈이 뺨에 떨어져도 녹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이 차갑게 식은 채 죽어버린 사람의 잔상. 유골의 형상이 불러오는 칼과 같은 폭력의 기억. 살아있다는 게 치욕스러워 그의 생이 곧 장례식이 되었다는 말. 피투성이 기억들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것처럼 비극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운명. 용서하지 못한 그들의 시간은 흐르지 않기에 되풀이할 뿐입니다. 당신은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희생은 결코 미화될 수 없기에 잔혹한 비극의 곁에 서있을 뿐이라고요. 그러니 차가운 눈의 이미지로 그려낼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때로는 따뜻하지 않은 것이 더 고귀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기어코 세상의 하얀 것들을 찾아내는 사람.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깨끗한 걸 더 먼저 보여주고 싶다며*** 백목련, 흰 새, 눈, 소금, 달, 파도, 쌀- 흰 것의 목록을 만들고 시를 쓰는 사람.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애틋해집니다. 언젠가부터 때묻지 않은 순수를 바라는 건 철 없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었죠. 하지만 고요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흰 단어를 모아 페이지를 채우는 다른 누군가의 마음도 있기에. 세상은 조금 더 쉬어갈 만한 곳이 되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제 눈망울에도 그리웠던 태초의 하얀 색을 다시 담을 수 있게 될 것만 같습니다. 내면의 무언가와 결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하얗게 웃는다고 표현하셨지요. 사진 속 당신의 얼굴에 비쳤던 그 여리고 하얀 미소 역시 그동안 견뎌온 세월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흉터를 덮어줄 문장들을 태어나게 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소중한 그 무엇과도 작별하지 않았을 겁니다.


참으로 영광입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작가가 또 한 명 생긴 것은요.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무언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이요. 좋아하는 작가로 당신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은 고통과 상처를 넘어서는 무언가의 힘을 믿는 사람일 것 같습니다. 제가 읽은 문장의 총합으로 저는 소외된 자들이 지지 않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진심을 담은 기도가 언어 속에서 시리게 아름다운 눈의 감각을 이룹니다. 그 겨울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모든 이들이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배울 겁니다. 세상의 중심에 나의 모국어가 울려퍼지게 해주셔서, 위대한 작가와 동시대에 연결되는 감동을 누리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추운 겨울이 올 겁니다. 앞으로는 찬 공기를 느낄 때마다 기억하겠습니다. 깊은 겨울의 끝에서는 홀로 걷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당신의 문장을, 필연히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요.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마음 깊이 축하하며,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한강, <흰>, 문학동네, 2018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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