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도봉쓰담>에 게재된 글을 수정하였습니다.
마을버스 6번을 타고 구 소피아호텔 전에 내린다. 갈빗집을 끼고돌아 카페가 나오면 한 번 더 우측으로 꺾고 20미터쯤 걸어간다. 유리창에 크게 적혀 있는 ‘책방’.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불을 켠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린다. 가끔은 옆 카페에서 받아온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 본격적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지난 6월부터 책방에서 협동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됐다. 서점에서 주로 하는 일은 손님맞이. 하루에 고객 한 명이 올까 말까지만, 그래도 맞이할 사람이 끊이지는 않는다. 얼마 전 개천절에는 동네에서 도시재생 일을 하던 친구가 구경하러 놀러 왔다. 예전에 근무하던 청소년기관 졸업생들도 찾아오고, 이웃한 커뮤니티 공간 실무자나 현재 간사로 함께하는 청년 모임의 간부들도 자주 드나든다. 책방이지만, 책보단 ‘방’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달까. 이렇듯 비빌언덕은 막상 도서를 구매하는 사람보다, 놀러 온 사람으로 북적이는 아지트다.
손님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업무를 마칠 때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다. 영업시간은 저녁 7시까지지만 할 일을 하다 보면 8시를 훌쩍 넘긴다. 잠시 돌려 둔 환풍기를 멈추고, 선풍기와 멀티탭도 종료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와 사물함 제일 밑의 칸을 연다. 리프팅 스트랩, 운동용 가죽 벨트, 손목 보호대까지 꺼내면 이제 책방 문을 나설 차례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쌍문역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24시 O피트니스’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주차장 입구를 지나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내려가다 보이는 투명유리문 안쪽으로 사람들이 가득하다. 데스크 직원과 눈은 마주치지 않고서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탈의실로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고 제일 먼저 어떤 운동기구가 비어 있는지 힐긋 살펴본다. 아직 반 정도는 다른 회원들이 차지하고 있다.
헬스를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실 운동 기간은 2년 남짓이다. 고무줄처럼 체지방률이 줄었다가 늘었다가를 반복하던 차에 몇 달 전 다시 운동을 결심했다. 이전에 다니던 헬스장 회원권이 만료되고 새로운 헬스장을 찾아볼 때, 고려했던 것은 크게 세 가지. 운동기구가 골고루 갖춰져 있는가. 주변 운동시설에 비해 회원권 가격은 합리적인가. 운영시간이 24시인가.
피트니스센터를 네댓 번 바꿔 오면서, 바꿀 때마다 느낀 차이는 운동기구의 다양성과 퀄리티. 같은 머신이라도 브랜드마다 각도와 근육을 자극하는 방식이 세밀하게 다르다. 가령 하체 운동기구인 핵스쿼트도 제조사가 D회사, W회사, M회사인지에 따라 자세가 조금씩 바뀐다. 할 수 있는 운동의 폭이 넓어지려면, 그만큼 다양한 운동 자세를 다루는 다양한 운동 머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비용도 중요하다. 간혹 책방을 비우고 시내로 나가는 외근 일정이 생긴다. 이전에 다녔던 ‘ㅁ짐’은 저녁 11시에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일정이 늦게 끝나면 시내에서 헬스장 1일권을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서울 내 헬스장은 몇 시간만 이용하더라도 기본 2만 원이 넘는다. 도봉구도 마찬가지다. 친구는 하루 5만 원도 결제해 봤단다.
어느 시간대든 지친 몸을 이끌고서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먼저 24시간 이용 가능한 헬스장을 쭉 찾아보니, 대부분 24시라 써놓고 밤 12시까지만 운영하고 있었다. 위치가 가깝고, 운동이 끝나면 마을버스 타기에 용이하며, 운동기구도 다양하고 가격도 적당한 곳은 몇 없었다. 고심 끝에 마침 리모델링으로 새 기구도 갖추고 할인 이벤트도 진행 중이었던 현재 피트니스센터를 고르게 되었다.
사람들을 잔뜩 만나고 나서 또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에 들어서면, 혼자 운동하는 사람, 사귀는 사이로 보이는 한 쌍, 친구 혹은 운동 메이트 무리가 보인다. 어느 밤에 찾아도 다양한 사람들로 헬스장은 붐빈다. 머신이 많아서일까. 늦게까지 운영해서일까. 중년 회원들은 홀로 운동하거나 하나둘 모여 자세를 봐주고, 커플들은 파트너십 운동을 한다. 가장 많아 보이는 고객층은 20~30대, 특히 남성 비율이 높다. 무척 무거워 보이는 중량도 술술 꽂아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횟수를 채운다.
사람들마다 운동하는 목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건강을 위해 시작한 측면이 크다. 다른 누군가는 몸을 키우기 위해서 혹은 줄이기 위해서 할 것이다. 목표치로 삼는 기준도 다 다르다. 체중, 골격근량, 체지방량, 체지방률, BMI, 인바디 점수. 유산소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도, 근력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트레이너 수준의 두꺼운 팔로 무게를 치는 회원까지 보고 있자니,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서 일상을 보내다가 늦은 밤 같은 헬스장에 나타나는지 궁금해진다.
러닝머신 위를 같이 달리며 어떤 운동이 빡세다고 푸념하는 중년의 여성들은 어떻게 친해졌을까. 체스트프레스 중량 100키로를 돌아가며 힘겹게 치는 세 남성은 어디서 처음 만났을까. 레깅스를 입고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데드리프트를 치는 저 사람은 어떻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트레이너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우락부락한 덩치의 저 회원은 어쩌다 이 헬스장에 오게 된 걸까. 같은 동네, 다른 일상, 같은 시간, 다른 운동을 하는 사람들.
헬스장 밖에서 만난 사람들도 떠오른다. 수유에 사는 청소년기관 졸업생은 지금쯤 주방 알바를 하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다니던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타다가 친해진 쌍문동 친구와 동아리 활동으로 만난 중계동 친구는 지금도 청년 모임 간부로 만나고 있다. 아마 불면증에 시달리며 유튜브와 씨름하겠지. 같이 책 모임을 했던 실무자는 이미 퇴근하고서 침대에 쓰러졌을까. 방학동 사촌은 지인들이랑 술 한잔하고 있으려나. 내년이면 군대 간다던데 술 한잔하자고 연락해야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면 생각이 비워진다고 했던가. 실제로 그 순간만큼은 떠오르는 게 없지만, 끝나면 비워진 만큼 새로운 질문들로 채워진다.
야근과 외근이 이어지다 보니 마지막 운동이 벌써 2주 전이다. 운동이 멈추면 루틴이 무너지고, 루틴이 무너지면 일상이 망가지고, 일상이 망가지면 다시 운동과 식단을 시작하기까지 다시 마음을 먹어야 한다. 마음을 먹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있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다시 일상을 살아 낼 체력이 떨어진다. 내일은 다시 헬스장을 나가기로 마음을 먹은 날. 눈짓으로만 인사하는 익숙한 얼굴들, 꾸역꾸역 다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갈 익숙한 다른 밤들, 또 다른 질문들로 다시 채워질 익숙한 일상들이 새롭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