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길모퉁이 가게> 리뷰
이 글은 <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114호>에 공동게재되었습니다.
M은 “쉬면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마들창조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이제 20대 초반이 된 M이 말한 쉼은 그저 보다 많은 쉬는 시간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충만히 찾아가며, 이에 필요한 합당한 존중과 도움이 보장되는 여유로서 ‘쉼’. 그 쉼은 어떠한 시공간 안에서 가능한 걸까.
마들창조학교에서 함께 지내는 B는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고 한다. 중학생인 그에게 현재 학교는 자신이 원하는 배움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다. 그런 B가 얼마 전 홀로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비록 잔고는 0원이었지만, B는 벅차오르는 표정을 지었다. 난생 처음으로 돈의 용도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경제적 권리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청소년의 일상에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몫은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에선 아무리 급해도, 화장실을 갈지 말지를 학생이 결정할 수 없다. 알고 싶거나 도전하고 싶은 배움은 쓸데없는 내용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삶에서 힘든 점을 얘기하면, ‘젊은 것이 벌써부터 뭐가 힘드냐’는 말을 듣는다.
그 규모에 상관없이, 청소년은 자기 돈조차 자기 의지대로 쓸 수 없다. 어디에 돈을 보관하고 또 사용할지에 대한 선택권이 부모에게 있기 때문이다. 노동할 권리도, 수익의 권한조차도 친권자가 가진다. 만약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에서 청소년이 임원을 맡으려면, 보호자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청소년은 친권자와 분리된 주체로서 자기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권리와 자원에서 배제되어 있다. 청소년은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없다.
청소년의 경제적 권리는 ‘어른’에게 일임되어 있기에, 청소년은 빈곤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있다. 교복이 자유화되면 옷을 사 입지 못하는 가난한 청소년들이 박탈감을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정작 청소년이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비싼 교복 값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는다. 그런 말들 속에서 청소년의 문화·정치·경제적 빈곤을 지속시키는 사회적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청소년의 자립’은 비단 돈 몇 푼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국한될 수도 없는 보다 총체적인 문제이다.
빈곤으로부터의 자립은, 누군가 임금노동을 해내는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을 넘어 그가 노동의 주체이자 사회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조건의 재구성이어야 한다. 그 과정을 개인과 공동체의 힘으로 실현할 때, ‘자립’은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당장 눈앞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자립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까. 지금의 시공간을 뚫고 나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정답 없는 질문들을 가지고 <길모퉁이 가게> 앞에 서게 되었다.
대안을 지향하지만 이윤을 내야 하는 일터, ‘소고’
다큐멘터리 <길모퉁이 가게>에는 청(소)년의 자립을 고민하는 한 현장이 등장한다. 마포에 위치한 <소풍가는 고양이>(이하 ‘소고’)는, 대학을 선택하지 않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놓인 청소년/청년이 자립할 수 있는 장을 열고자 만들어진 도시락 가게다. 2010년 비진학, 미취업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일 학습 프로젝트로 시작하여, 2011년부터 친환경 도시락 등을 배달 주문하는 회사로 창업했다. 영화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소고’의 풍경을 담아낸다.
작품 초반부터 분주한 직원들의 모습이 이어진다. 계산을 마친 물량임에도 재차 확인하고 있을 만큼, 일은 정신없어 보인다. 주문을 확인하거나 취소하는 전화로 인해 긴장한 얼굴들도 지나간다. 분주한 장면 사이사이,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난 청(소)년들의 소회를 듣는 시간도 있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의 상황,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이전에 없던 길 찾기의 불안정함. 하지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작업장의 무게감으로 인해, 삶의 증언들은 어느 순간 아득히 멀어진다.
영화에서 소풍가는 고양이는 기존 길모퉁이의 작은 가게에서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한다. 일하던 사람 중 누군가는 그만두었고, 누군가는 계속 일을 한다. 앞날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함, 이전보다 여유가 부족해진 관계망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씩씩’(소고의 대표이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렇게 영화는, 청(소)년의 생존의 대안을 고민하는 동시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일터를, 관객의 눈앞에 들이민다.
영화를 보기 전, 또 다른 자립 현장을 알게 된다는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함께하는 성장, 차이를 조율하는 노동 등 수년간 경험을 듣고 싶었다. 물론 이러한 노력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영화가 집중하는 이야기들은 기대와는 다른 결이었다. 사실 <길모퉁이 가게>를 보는 내내 아찔했고, 긴장되었다. 카메라가 비춘 현장의 중압감이, 예민하고 미묘해진 관계들이, 운영을 위해 고도화된 노동력과 배려 받지 못하는 감정이, 어찌할 방도는 없이 흘러가고 있는 ‘소고’가 그렇게 다가왔다. 엔딩 크레디트 중에도 끊이지 않고 중계되던, 직원을 향한 ‘씩씩’의 다그침이 불편해 결국 영화를 보던 노트북을 덮기도 했다.
낭만적이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며, ‘자립’을 다시 묻다
따로 또 함께의 힘을 통해 ‘나’로 서는 것을 자립으로 정의한다면, 복잡한 마음으로 곱씹어 본 <길모퉁이 가게>는 분명 자립의 정답으로서 ‘소고’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월매출 얼마 이상이어야만 한다는 정해진 조건은, 길을 찾아가는 공동의 논의와 교섭을 어렵게 만든다. 수익을 내기 위한 지난한 과정은 날카로운 반응으로 채워진다. 감독은 이윤을 내야만 지속할 수 있는 현장의 무게감에 주목한다. 영화 안팎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일터 ‘소고’는 안타깝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자립의 의미는 더욱 도드라진다.
일자리나 작업장의 수를 늘리는 것으로 청소년의 자립은 완성될 수 없음을 영화를 통해 다시 깨닫는다. 그렇다고 청소년의 자립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며, 어디서부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영화가 정확히 답하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공백 처리된 답란을 통해, 자립을 이상화하는 기존의 관념이 놓쳐온 피로를, 관계를, 감정을, 정치를 고민하게 만든다. 기대와 달랐던 영화의 서사는 애초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의 답이 되지는 않았지만 고민을 더 깊게 만들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립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모든 자립이 그러하듯, 청소년의 자립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이자 참고할 다른 서사가 거의 없는 삶의 이야기다. <길모퉁이 가게>가 던진 무거움은, 자립에 대한 판타지 속 빈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청소년의 가난이 빈곤포르노 혹은 해피엔딩으로 주로 소비되는 이데올로기적 현실에서, 기존의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이야기를 담아내었다는 점은 <길모퉁이 가게>의 의미를 만든다. 안정적인 ‘일터’와 그 안정성 ‘너머의 것’을 포괄하는 구체적인 자립을 그려보는 일은, 영화를 본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