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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Aug 25. 2021

지금도 슬프고 궁금한 건

그곳이 어디쯤 일지 – 강인한


엷은 새벽빛이 흘러와

벽에서 4호 액자가 떠오른다

삼십 년 전라도 어느 개울과 산이 날것으로 숨 쉬다가

젊은 화가의 선과 색채를 입고

이 작은 액자 속으로 들어온 것이니

그곳이 어디쯤 일지


내 어린 날 겨울이었으리

곤죽이 된 논바닥에 푹푹 빠지며 연을 날리는데

까마득한 하늘에서 홀연 실을 끊고 사라져 버린

그 연의 행방이여

첫 여인의 소식처럼 지금도 슬프고 궁금하다


  시(詩)를 읽다 보면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나를 만난다. 이 시(詩)에서도 ‘벽에서 4호 액자가 떠오른다’에서 멈칫한다. 그랬다. 어린 날 춤추고 노래해서 받은 상품으로 액자가 있었다. 그게 어디로 갔을까? 나는 많은 시간을 그 액자의 풍경 속에 들어가 혼자 놀았다. 열 살 무렵 마을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행사 노래자랑이 있었다. 큰 오빠가 기타를 치고 내가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를 불렀다. 큰 오빠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기타를 잘 쳤다. 그때 도시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둘째 셋째 오빠는 고고춤, 룸바춤, 도돔바 등을 배워와 동생들에게 전수해주었다. 나는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춤을 빨리 배워서 기타 반주에 맞춰 제법 모양을 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행사 상품에 눈독을 들인 나는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노래 부르고 춤을 추어서 일등을 했다.


 부상은 액자였다. 그림은 익숙한 자연풍경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옛 이발관에 많이 걸려있던 그림이다. 큰 강이 흐르고 그 옆에 물레방아 간이 있다. 들판에 빨강 노랑꽃들이 바닥에 붙어서 피어있고 산은 아슴아슴한 보랏빛이다.  이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외갓집 큰 강에서 보는 먼 산과 들, 강 풍경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때면 액자를 쳐다보다가 풍경 속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물레방앗간 피혁 돌아가는 소리가 ‘타악 타악’ 들리는 것 같아 액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가끔 액자 속 풍경이 어디쯤 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집에 혼자 있는 날에도 심심하지 않았다. 외갓집 산과 들이 날것으로 숨 쉬다가 그대로 액자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시에서 학교 다니느라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문득 생각나 액자를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식구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액자는 어디로 갔을까?


  이 시(詩)의 두 번째 연은 내게 회상의 선물을 준다. 실을 끊고 떠나버린 연의 묘연한 행방보다, 곤죽이 된 논바닥에서 대보름날 밤에 망우리 돌리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설을 지내고 보름이 가까이 다가오면 오빠들은 깡통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고 철사 줄을 달아놓았다. 밤이 되면 동네 언니 오빠들은 각자의 깡통을 들고 논바닥에 모였다. 깡통에는 작은 관솔 가지를 한 주먹 묶어서 넣은 뒤 불을 붙였다. 그리고 ‘대보름날 망우리여!’를 크게 외치면서 깡통을 돌렸다. 달이 뜨면 돌리던 깡통을 멈추고 소원을 빌었다. 깡통 불이 타면서 내뿜는 자잘한 불똥들은 하늘의 별들이 내려온 것처럼 반짝거리다가 사르륵 사라졌다. 나도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당장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대보름날 밤에는 사람들이 마을에서 가장 긴 다리를 나이 수만큼 왔다 갔다 했다. 이렇게 하면 일 년 동안 다리가 아프지 않으며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초저녁에 다리를 건넜다. 처녀 총각들은 보름달이 휘영청 밝을 때 몰려와서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나이 수가 홀수면 집과 반대쪽에 닿기 때문에 애초에 누군가 업고 집 쪽으로 데려다줘야 했다. 처녀총각들은 미리 약속을 하고 깔깔대며 다리를 건넜다. 밝은 달빛 아래서 듣는 그들의 경쾌한 웃음소리는 초여름 아기 소들의 소 방울 소리처럼 맑게 울려 퍼졌다.


  처녀 총각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린애들은 막무가내로 다리를 건넜다. 나도 홀수 나이에 집 쪽에서 건넜다. 어렸지만 나는 내심 좋아하는 오빠가 나를 업어주기를 바랐다. 그 오빠는 나보다 한 살 위다. 그 오빠 형제들은 대체로 나의 오빠들과 연배가 비슷비슷했다. 오빠들은 한데 몰려다니며 축 구도하고 화투치기도 하면서 방학을 보냈다. 오빠들은 윷놀이에 나를 끼워주기도 하지만 자주 있지는 않았다. 


 정월 대보름날 그 오빠가 나를 업어줄 수 있는 건 내 나이가 홀수 여야 했다. 마침 나는 열한 살이었다. 다리 건너기 전 나의 오빠 말고 그 오빠한테 업어달라고 했다. 흔쾌히 알았다고 한다. 보름달이 노란빛으로 다리를 비출 때 오빠 등에 업혀서 다리 건너던 짧은 시간, 그 순간은 영원 속으로 가고 싶었던 최초의 염원이었으리라. 비록 ‘열 발, 스무 발’ 소리 지르며 놀이하는 수준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냥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일 뿐이었다. 아직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성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올 해도 보름달이 밝게 떴다. 언제부터인지 대보름날 부럼도 깨물지 않고 소원도 빌지 않게 되었다. 액자의 풍경 속 꽃들은 어디쯤에서 피고 지고 있을까? 어린 날 나를 등에 업고 다리 건너던 그 오빠는 지금 무얼 할까? 나는 오늘도 스마트폰 구글 검색에 오빠 이름 세자를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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