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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Oct 16. 2021

가을의 끝에 서면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이기철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 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인생에서 사라져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이 엉뚱한 상황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자발적 생성을 통해 재생되어 나타나는 일들은 대체로 한 시절 감정에 영향을 준 것들이다. 특히 계절과 관련된 일들은 색채감이 뚜렷해서 금방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기억들은 기쁨이나 슬픈 감정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련한 행복감을 준다. 최근 레트로가 다시 주목받으며 옛날 사진 속 장소와 인물, 포즈 등을 재연하며 매년 변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찍는 것도 추억을 되새기며 행복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닐까?


가을이다. 추억을 반추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추억을 불러오는 시(詩) 중에서 위의 시는 겨울보다 가을에 더 짙게 여운이 남는다. 벌레의 한 생을 담아냈음에도 나뭇가지 하나 흔들지 못하는 고치 집의 가벼움, 벌레와 다름없는 내 생의 가벼움을 생각하면 산다는 게 참 눈물겹다. 하지만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처럼 시절마다 쌓인 추억 거름이 생을 기름지게도 하니 등 뒤로 사라진 어제가 가볍지만은 않다.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에 이르면 목울대가 묵직해져 온다. 늦가을 추억의 언저리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풍경들이 가을 햇살처럼 가슴을 노랗게 물들이기 때문이다.


 외갓집에는 명재라는 나 보다 한두 살 위인 머슴 아이가 있었다. 명재는 아버지가 도끼로 엄마를 죽이고 감옥에 갔기 때문에 천애고아라고 했다. 줄무늬 러닝과 까만 고무 반바지를 입은 명재는 매일같이 소를 몰고 동네 산을 돌아다녔다. 명재는 잣 알갱이처럼 얼굴이 작고 갸름했는데 말을 할 때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을 오므리면서 쭉 내밀었다. 그럴 때면 얼굴이 못생겨졌다. 그러나 방아깨비나 호투 잠자리를 잡아서 나한테 줄 때, 방개를 잡아서 대야에 넣고 같이 놀 거리를 만들 때면 막내 오빠보다 더 오빠같이 듬직했다.


 어느 가을날 명재가 소를 몰고 산으로 갈 때 나도 같이 따라나섰다. 큰 강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산들이 붉고 노랗게 물들어있고, 구름이 조각조각 흩어져 하늘 높이 떠있었다. 해는 급격히 짧아지고 어른들은 벼를 베거나 깨를 털거나 가을걷이에 분주했다. 가을엔 각자가 맡은 구역에서 해가 질 때까지 고물고물 등을 보이면서 일을 했다. 소가 꼬리를 휘두르며 야산으로 갈 때면 어른들은 하나 둘 일어나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밭과 이어진 뒷산에는 햇살이 비치어 나뭇잎이 온통 황금색을 띠었다. 명재는 나무를 잘 탔다. 소를 나무 둔치에 묶어놓고 어떤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잡아당겨서 열매를 땄다. 열매는 톱니바퀴 같은 이파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도토리처럼 생겼다. 색깔도 갈색이다. 이빨로 깨면 “딱”소리가 났다. 명재는 입으로 깨서 하얀 알맹이를 꺼내 내게 주었다.


“이게 뭐야?”

 “깨금이야”


 ‘깨금’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어봤다. 열매도 처음 봤다. 맛도 처음이다. 생밤 맛 같기도 하고 잣 맛 같기도 했다. 잣나무는 산에 많아서 그 맛이 어떤지 아는데 깨금은 또 다른 맛이다. 새로운 맛은 질리지가 않아서 아귀가 아프도록 먹었다. 우리의 배가 깨금으로 채워졌을 때 풀 뜯던 소도 배가 부른 지 마른 솔가지 위에 엎디어 큰 눈을 껌뻑이며 졸고 있다. 산에 비치던 금빛 햇살이 산마루로 숨어버리자, 명재가 “집에 가자” 하면서 소고삐를 풀었다. 소는 구부려져 있던 앞발을 펴면서 ‘그래 집에 가자’ 하듯 뒤뚱거리며 일어섰다. 커다란 소가 쪼그만 명재가 끄는 줄에 이끌려 느릿느릿 걸어갈 때면 명재는 임금님처럼 멋있어 보였다. 명재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러 떠난 해에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했다. 작별인사 없이 사라진 아이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줄무늬 런닝셔츠와 까만 반바지는 커다란 소와 대비되어 내게 작은 그리움의 표상이 되었다.


 가을이 때론 따듯한 오렌지 빛으로 느껴지는 건 ‘깨금’이라는 예쁜 단어를 가르쳐주고 감각으로 추억할 수 있게 ‘깨금’ 맛을 알게 해 준 꼬맹이 명재 덕분이리라. 가을이 오면 이마를 한쪽으로 치켜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응애야 이것 잘 봐봐, 방개가 어디로 가게?”하던 그 아이가 그리워진다. 살면서 겹겹이 기워진 마음이 따스한 체온으로 스르륵 녹아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을의 맛인 ‘깨금’을 잊을 수 없어서 그동안 여기저기 많이 찾아봤다. 겨우 한 매체에서 깨금이 ‘개암’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개암나무’가 깨금 나무고, 커피재료인 헤이즐러 원료라고 한다. 커피를 많이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잊을 수 없는 깨금 맛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재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동무의 이름 ‘명재’를 불러본다. 삶의 한 구석이 춥고 외로울 때 유년의 알록달록한 추억들이 온기를 더해준다. 내게는 계절이 불러주는 소소한 추억의 편린들이 생에 대한 움을 틔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보이는 것만 사랑하지 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주는 삶의 무게를 알아채기. 시가 주는 여운에 깊이 빠져드는 가을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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