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 똥 - 송찬호
산토끼 똥 – 송찬호
산토끼가 똥을
누고 간 후에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토끼는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시(詩)를 읽으면 토끼 똥이 턱을 괴고,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토끼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토끼는 산비탈 배추나 무밭에서 눈 속에 묻힌 채소 이파리를 찾다가 그만 똥만 누고 떠났는지 모른다. 온통 희기만 한 눈밭에 까만 점처럼 박힌 토끼 똥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또 ‘똥’이라는 단어가 입안에 침이 고일만큼 정감 있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다. 내가 ‘똥’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쓸 때는 막내아들을 ‘똥강아지야’하고 부를 때뿐이다. 돼지 똥이나 소똥도 아니고 귀여운 토끼 모습과 겹쳐진 똥이라서 그런가, ‘똥’이 살아있는 생물로 느껴진다. 아무래도 한 존재가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본체와 분리될 수 없나 보다.
자신의 똥을 버리고 산 넘어가고 있는 토끼를 쫓아가다 보면, 토끼의 안타까운 겨울 살림을 생각하지 못했던 어린 날과 마주하게 된다. 외갓집에서 겨울이면 빼놓을 수 없는 겨울철 별미는 토끼고기 만둣국이다.
겨울방학이면 오빠 넷이 한꺼번에 외갓집에 왔다. 중학생인 큰오빠가 동생들을 데리고 외갓집에 오면 조용하던 동네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둘째 작은 외할아버지 집에는 ‘쇠구’라는 일꾼이 있었다. ‘쇠구’는 그 당시 열다섯이나 열일곱 정도 되었다. 쇠구는 큰오빠 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컸다. 외갓집 동네에 쇠구 또래 남자가 없어서인지 오빠들이 방학에 오면 쇠구를 중심으로 잘 모였다. 더구나 겨울철에는 쇠구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소한테 여물을 끓여주거나 나무를 하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때마다 쇠구는 산에 짐승을 잡으러 갔다. 털 귀마개를 하고 검은색 윗도리를 입은 쇠구는 어른처럼 보였다. 쇠구는 짐승을 잘 잡았는데, 참새, 꿩, 족제비, 토끼가 주를 이뤘다.
쇠구가 짐승 잡는 솜씨를 보여주는 때는 특히 눈이 온 다음 날이다. 몇 날 며칠 눈이 내리면 고립된 외갓집 뒷동산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딱 딱’ 하고 났다. 낮에 움직일 수 있는 데라곤 외갓집 대문에서 작은 외갓집 쪽문까지 싸리비로 눈을 쓸어 낸 좁다란 길뿐이다. 아이들은 사랑방에서 딱지치기를 하면서도 지루해했다. 그러던 참에 쇠구가 ‘토끼 잡으러 가자!’ 하고 소리치면 딱지를 팽개치고 밖으로 내달았다.
쇠구는 오빠 또래들을 모아서 뒷동산으로 갔다. 나는 오빠들이 왔으므로 쫓아갈 수 있었다. 쇠구는 낫을 하나 들고 옹로를 가지고 갔다. 옹로는 마른풀 같은 걸로 만들어진 올가미다. 일종의 덧이나 올무 같은 것인데 토끼를 잡기 위해 사용되었다. 토끼는 무서움이 많아서 다니던 길로만 다닌다고 한다. 눈 위에 토끼 발자국이 있으면 오빠들은 우르르 발자국을 따라 토끼를 잡으러 다녔다.
쇠구는 토끼 발자국이 없어도 토끼가 다니는 길목을 잘 알았다. 토끼가 다니는 길에 미리 옹로를 놓고 토끼를 찾아다니면 영락없이 토끼가 옹로에 걸려들었다. 어떤 때는 우리들을 먼발치 세워놓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혼자서 토끼를 막 몰아 댔다. 토끼는 쇠구가 몰아 대면 산 쪽으로 냅다 도망쳤다. 쇠구가 산언덕 너머로 토끼를 쫓아 사라져 버리면 우리들은 발꿈치를 들고 목을 빼면서 쇠구를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쇠구는 허리춤에 토끼를 두 마리나 매달고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우리에게 왔다. 쇠구가 잡은 토끼는 그날 점심이나 저녁 만둣국 재료로 쓰였다.
토끼고기가 들어간 만둣국은 김치와 두부만 넣은 만둣국보다 몇십 배 더 맛있었다. 얼었던 코에서는 녹은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둣국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럴 때 쇠구는 양반다리를 하고 천천히 만둣국을 먹으면서 우리들 보고 ‘많이 먹어’ 했다. 청솔가지로 데워진 방바닥, 쇠구 바짓가랑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얼었던 바지가 녹아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경외의 마음을 품고 코를 훌쩍이며 만둣국을 먹었다. 이때의 만족감은 회상할수록 증폭되어 성장통을 감소시켜주는 행복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겨울의 심연 속에는 차가운 눈바람과 뜨거운 만둣국물이 둥글고 투명한 수정체가 되어 반짝거리고 있다.
깊은 생각에 빠진 토끼똥을 떠올리다가 그만 삼천포로 빠졌다. 시의 맛이다. 시를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토끼를 해체해서 요리를 해서 먹었으니 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시가 내게 행복을 불러다 주었으니 시는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겨울에 별미처럼 ‘산토끼 똥’을 읽는다. 시어를 곱씹다 보면 버려진 자의 슬픔을 생각하기보다 까만 눈을 말똥말똥 굴리는 토끼똥의 사색에서 남겨진 자의 여유를 더 느끼게된 다. 어느덧 나도 일선에서 물러나 남겨진 인생행로에 접어들었다. 토끼똥만큼의 존재는 되는 걸까? 토끼 똥만큼의 여유는 갖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금 토끼는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이 문장에서 시선이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