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am
새벽 1시쯤 눈이 떠졌다. 잠깐 사이에 꿈을 꿨는데 희한한 꿈이었다. 벌이 나를 따라 방에 들어왔다. 어서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잡으려했는데 그 벌은 갑자기 병아리가 되었다가 닭이 되었다가 마지막엔 어린아이가 됐다. 그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며 떼를 썼다. 어느 민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동양적인 판타지같지 않은가? 호접지몽처럼 나비 대신 벌이 나오고, 벌이 어린아이가 되는, 그런데 그 어린아이가 꼭 나같아서, 그래서 나는 혹시 벌이 아닐까, 싶은 그런 꿈 말이다. 그 아이는 우리(나는 혼자가 아니었다)가 내쫓으려하자 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알고 보니 아이의 엄마아빠는 바닷가에서 일하느라 주말에만 오고, 보통은 이모와 살고 있었다. 그래서 벌이 되어 우리에게로 온 걸까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람들이 피하려하고, 내쫓으려하는 벌로 변한걸까 싶었는데,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온전히 함께하지 못하는 운명이 벌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닮아있는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사실 벌로서도, 닭으로서도, 아이로서도 온전히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벌은 사람들이 피하니까, 닭은 사람들이 먹으니까, 아이는 사람들이 무례히 대하니까 말이다. 함께하고싶지만 함께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떼를 썼나 싶기도 하다.
요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있다. 요조는 태어난 게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과 함께하기 어려워하지만, 익살스러운 연기로 그 어려움을 숨기며 살아간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태어났기에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마치 신의 장난처럼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탄생한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느껴지게 한다. 그러니 꿈 속의 벌처럼, 그 어린아이처럼 모순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다고말이다. 함께하고 싶지만 함께할 수 없는, 혹은 함께하고 싶지 않은 운명의 시소는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지 못한 채 평행인 채로 놓여있을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려니 하며 떼를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23년 2월 2일 목요일
호접지몽, 5:45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