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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래 Oct 04. 2019

국경 너머 첫 도시

[사카르트벨로] 두 번째 이야기, 라고데키 Lagodekhi


두 발로 국경을 넘다


    걸어서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보통 국경에는 마을이 거의 없고, 그곳의 택시 기사들이 세상 가장 야박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받아줄 선인이 없는, 마음에서부터 이미 삭막한 곳이 바로 국경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낭여행자에게 국경이란, 이 모든 장애물을 처리하며 이동하는 동안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가혹한 곳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로로 국경을 넘을 때의 그 미묘한 감정은 승부욕 없는 내게도 일종의 성취감을 주곤 한다. 사실상 섬과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 국경의 개념이 생경한 탓일지도 모른다. 두 발로 나라와 나라 사이를 통과하는 건, 내게 두려움보다 흥분되는 설렘이 앞서는 일이다.

    그날도 그랬다. 새로운 나라를 밟을 생각에 이른 아침부터 몸을 일으켜 분주히 움직였다. 아제르바이잔 셰키에서 발라칸이라는 국경 마을로 가는 마슈롯카(코카서스 3국의 보편적인 대중교통)를 타고 한 시간쯤 달리는 동안, 북쪽으로는 대코카서스 산맥의 황홀한 풍광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절경을 감상하는 사이지난밤에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던 '대중교통을 타고 라고데키까지 가는 법'이 잊혔던 것일까... 국경에 내리자마자 택시 기사 아저씨들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린 사람이 바로 내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제르바이잔 셰키에서 발라칸으로 가는 길,  북쪽으로 보이는 대코카서스 산맥


    "노 마슈롯카. 보더, 원마낫" 

    발라칸에서 라고데키 중심지까지 가는 마슈롯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들었는데도 국경까지 단 돈 1마낫(약 600 원)이라는 말에 냉큼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출발함과 동시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라고데키행 마슈롯카...... '노 마슈롯카' 를 너무도 쉽게 믿었던 내가 너무나도 바보 같아 그만 눈물이 맺혔다. 택시에 동석한 아제리인이 히잡을 곱게 쓰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제르바이잔 출입국관리소로 향하는 계단은 좁고도 길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참을 걸어 사무소 안에 도착하니 초록 빛깔 군복을 갖춰 입은 아제리 군인들이 서있었다. 그들의 각 잡힌 태도는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고, 어깨가 더 이상 가방의 무게를 버텨주지 못할 즈음 심사가 끝나 조지아로 넘어갔다. 이란에서 아제르바이잔으로 넘어올 때도 출입국관리소에는 온통 군인들만 있었고, 이들은 존재감만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듯했다. 그에 비해 조지아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분위기는 편안하다 못해 아주 느슨했다.

    "가마르조바 გამარჯობა" (안녕하세요.)

     어색한 억양이었지만 미리 공부해간 조지아어로 첫인사를 했다. 심사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별다른 질문도 없이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과연 '무비자 360일'의 나라다웠다.

    "마들로바 გმადლობთ" (감사합니다.)

  




국경의 택시 기사


    상쾌한 기분으로 출입국사무소를 빠져나왔다. 눈 앞에 보이는 건 간이 환전소와 택시 기사의 얼굴들 뿐이었다. 환전율은 확인하지 않아도 나쁠 것이 분명하고 택시 기사들은 터무니없는 요금을 제시할 테니 일단은 아제르바이잔에서 만들어온 감자 샐러드를 빵에 발라 먹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이제 점심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꼬르륵' 소리가 알려온 참이었다.

    국경을 통과하는 마슈롯카 행렬을 관찰하며, 그 안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나를 탓하며 한 시간 전의 내 모습이 원망스럽다가도 감자 샌드위치의 맛이 꽤나 훌륭하다 생각했다. 국경을 가르는 강줄기를 따라 물 흐르는 소리가 좋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유독 푸르렀다. 그러나 이런 감상도 잠시일 뿐, 내리쬐는 볕이 살을 달궈 따가웠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 졌다.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를 찾아가야 함을 의미했다.


    예상대로 택시 기사는 짧은 거리에 비해 매우 높은 요금을 제시했고 우리는 순식간에 라고데키에 닿았다. 구글 맵스를 보며 게스트하우스 앞까지 가 달라는 내 요청에 택시 기사는 2라리(약 1,000 원)를 더 달라고 했지만, 불과 200m 사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보더니 입을 닫는 양심을 보여줬다. 

    게스트하우스 앞에 무사히 도착한 나는 구글 번역기를 돌려 '당신이 나에게 요구한 택시요금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당신은 내가 만난 첫 조지아 사람인데, 나는 크게 실망을 했다.'라는 문장을 보여주었다. 택시 기사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내리더니 차를 몰고 사라졌다. 


    앞서 내가 '나는 승부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 말을 번복해야 할 것 같다. 돌아보면 택시 기사들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좀 더 얹어줬다고 해서 왜 그렇게 억울해했나 싶다. 여행지에서 내 마음을 지키는 일이 그깟 푼돈보다 덜 소중 할리 없으니까. 조금은 유연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나.

    그날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화를 삭이면서 택시 기사를 향한 내 분노의 근원을 묵상했다. 택시 기사를 포함해서 불합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괜스레 전의를 불태운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다 나의 퇴사 스토리까지 흘러갔다.


    퇴사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상사가 내 자존감을 야금야금 갉아먹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스스로를 본인보다 '모자라고 멍청하고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여기도록 하기 위해 온 정성과 힘을 다했다. 언어적, 비언어적인 무시와 냉대를 받은 내 몸에는 전에 없던 두드러기가 돋아났고 위장마저 운동을 멈춰 소화 기능이 마비되었다. 급기야 내 친구들은 원인도 치료법도 없는 이 병을 '주은정(상사 이름. 가명) 병'이라고 진단했다.

    그렇다고 내가 묵묵히 참기만 하는 가마니 같은 사람은 아니다. 상사가 내게 쏟아내는 인신공격에는 사내 분위기가 용납할 만큼의 반문을 했고, 무리한 요구가 들어오면 불쾌감을 표현하며 나름대로의 제동을 걸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나를 지켜내는 일이 그 사람도 지키는 일이라 믿었다.

    '당신의 행위는 나쁜 일이고, 나는 그런 불합리를 허용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그 사람이 더 이상 악독하게 굴지 못하도록 선을 그어주는 일을 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 사람은 또다시 내 후임1의 자존감을 훔쳤고, 후임1의 초고속 퇴사 이후에 입사한 후임2의 자존감을 열심히 빼앗고 있다 전해 들었다. 후임2가 제삼자에게 나의 퇴사 사유를 물었다는 소식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 제공이 상대에게 있었다 해도, 내가 사용한 언어와 말투, 표정이 좀 더 부드러울 수는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특히 여행에서 만난 무법자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금 더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늦은 후회를 할 때가 많다.



인도 고락푸르역,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는 풍경 / 파키스탄 카라코람 하이웨이, 길 위에서 쉬어가는 사람들


    

십여 년 간 길고 짧은 여행을 하며 인내심이 늘 만큼 늘었다 생각했다. 천재지변으로 비행기가 지연되는 일, 승강장에 누워 예고도 없이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일, 만석인 버스를 눈앞에서 떠나보내는 일, 꼬불꼬불 산길을 30시간 동안 달리는 일 등등... 몸이 고달픈 것엔 이골이 났지만, 사람에게 받는 상처와 배신감 앞에선 늘 어쩔 줄을 모르겠다. 무례함은 언제나 낯설고,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니까.




    

* 특정 직업군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국경의 택시기사, 이 원망의 대상이 혹여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로 여겨질까 두려운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야박한 극소수의 택시 기사 분들의 이야기가 가끔 들려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택시 기사님들은 그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셨다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라고데키 산책


    길고 느린 여행은 어쩌면 일상과도 같다. 낯선 침대에 몸을 누이고, 처음 만나는 골목길을 걷고,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는 매일이 점점 익숙해진다.

    '키위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수도 트빌리시를 제외한 조지아의 지방 도시에는 가정집 민박 형식의 게스트하우스가 대부분이었다. 가정집 게스트하우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조지아 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주인을 잘 만나면 현지인들만 아는 장소에 가거나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나와 잘 맞지 않는 주인을 만나게 된다면 여러 부분에서 불편한 상황이 연출될 위험이 있다.

    키위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말수가 없고 적당히 친절한 아주머니였다. 아담한 집의 2층이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었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앞마당에는 예쁜 그네가 놓여 있었다. 2층은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방에는 누군가가 사용하던 살림살이가 그대로 있고 복도에까지 침대가 놓여 있어 조금은 어수선한 모양새였다.


조지아 라고데키, K 게스트하우스



   먼저 도착한 남성 여행자들이 방 두 개를 차지했고 제일 안쪽 방만이 비어있다 했다. 안쪽 방에 들어가 보니 해가 거의 들지 않아 한낮에도 한기가 돌았다. 남성 여행자들과 분리되면서 비교적 따뜻해 보이는 복도의 첫 침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짐을 내려놓고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한 후, 가뿐한 마음으로 동네 산책을 나섰다.

 


    라고데키는 정말 조그마했다.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딸린 가정집 숙박시설이 몇 개 있었고, 시내라고 할만한 중심 도로는 더없이 한산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 라고데키를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국경을 넘을 때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문쯤으로 여기지만, 마을 북쪽으로 괜찮은 트래킹 코스가 있어 시간적 여유가 비교적 많고 산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이 애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네팔에 가서도 트래킹을 하지 않을 정도로 등산에 흥미가 없는 나에게 라고데키는 그저 작은 마을로 기억된다. 나쁘지도 그리 좋지도 않은 조그마한 마을이었지만, 국경에서 곧장 시그나기로 가지 않고 라고데키에 머문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한다. 짧게나마 동네를 거닐며 포도밭을 구경하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가마르조바'라고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휴식 같았기 때문이다.

    거리를 걷다가 환하게 웃으며 환영의 제스처를 보내던 여자 아이를 만났고, 은행에서 환전을 하고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들른 슈퍼마켓에서는 인심 좋은 아주머니로부터 양파를 덤으로 받기도 했다. 사소한 일이지만 아주머니의 온정에 굳어있던 마음이 스르르 녹는 듯했다.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누려고 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었다. 


    이슬람권이었던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지나온 터라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교회와 사제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모스크 대신 교회, 초승달 대신 십자가, 이맘 대신 사제가 있는 모습을 보며 전혀 다른 나라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인사말도 '앗살라말레이쿰'에서 '가마르조바'로, 화폐 단위는 '마낫'에서 '라리'로... 선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 땅에서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어떤 우연과 운명이 내게 찾아올지 기대가 커져갔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막 푸른 잎을 내기 시작한 포도나무를 관찰하고, 북쪽으로 보이는 설산에 구름이 걸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피로한 하루를 정리했다. 만약 오늘 밤이 편안하다면 라고데키에서 하루를 더 머물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드는 생각에 발걸음을 맡기기로 하며, 내일을 계획하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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