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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래 Oct 18. 2019

머물러야 보이는 것들

[사카르트벨로] 네 번째 이야기, 시그나기 Sighnaghi

  


내 여행의 색깔


    다음날 아침이 밝아왔다. 일찌감치 약속 장소에 나가 투어 차량을 기다렸지만 자리가 부족해서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S, 치우와 함께하지 못하는 건 크게 아쉬웠지만, 마침 아침부터 월경이 시작되어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기도 했고 더 좋은 날에 다비드 가레자에 가게 될 것을 기대하며 혼자 남았다.

    치우는 다비드 가레자에서 바로 트빌리시로 간다고 해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S는 다시 시그나기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어젯밤에 본 내 숙소 전망에 반해 숙소를 옮길 작정으로 체크아웃을 했다 하기에 그의 배낭을 받아 들었다.

    S의 배낭은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자부하는 내 배낭보다도 부피가 작고 가벼웠다. 배낭여행을 다니며 나보다 적은 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은 S가 처음이었을 정도였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고, 뭐든 잘 먹었으며, 여유가 있되 부지런했고, 짐이 정말이지 몇 개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S와는 여행 스타일이 비슷했다.




    '여행은 반드시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원칙은 없지만 '이런 여행을 하고 싶다.'라는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의 사람과 어우러지며, 현지어로 말하고, 현지 음식을 먹고, 관광지보다는 골목길에 집중할 것! 요약하자면, '사는 것처럼 여행하기'가 될까. 내 여행의 색깔은 삶과 여행 사이의 중간 빛을 내길 바랐다.


    세계 지도가 인쇄된 종이에 그간 다녀온 나라를 색칠해봤는데 여행을 다닌 기간에 비해 발자국을 찍은 나라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아 나조차도 놀란 적이 있었다.

    6년 전에 인도, 네팔, 파키스탄에 갔을 때였다. 애초의 계획은 3개월 동안 이란과 터키를 지나 이집트까지 가는 거였다. 당연하게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 계획이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고 나도 몰랐던 내 여행의 속도감을 발견하게 되었다.


    느릿하게 걸어 다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아이들의 헛발질에 날아온 공을 어설프게 던져주고, 목적지 없이 달리는 꼬마들의 무리를 괜히 쫓아가 보기도 한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집 앞을 지날 때면 누군가가 나를 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할 것만 같아 발걸음이 느려진다. 화려하지 않지만 아담하고 정갈하게 꾸며놓은 응접실 카펫 위에 나를 앉혀놓고는 손짓과 몸짓으로 차를 마실 것인지 물어볼 것이다. 뜨거운 차를 유리잔에 조심스럽게 따른 뒤 설탕을 담뿍 넣고 휘휘 저어 나에게 내밀면, 평소에 단 것을 싫어하는 나일지라도 엄지를 세우며 홀짝홀짝 들이마시겠지.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꺼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작별 인사는 열 번으로도 끝날 줄을 모를 것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름 그림자를 지켜보다가, 흔들리는 해먹에 몸을 맡긴 채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기도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것저것 문맥 없는 문장을 끄적이는 것도 좋다. 같은 숙소에 묵는 여행자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그런 나를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질질 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도 있을 것이다. 마지못해 따라나서지만 '어디서든 혼자는 아니구나' 안도하며, 어제 보았던 그 풍경이 노을 질 때는 어떤 모습일지 한 번 더 보러 가면 안 되겠느냐고 졸라 댈 것이다.


    여행의 기간과 형식에 관계없이 '여행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행을 선택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고, 여행을 완벽하게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도 보았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주어진 여행에 좀 더 성실하게 화답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부지런히 골목길을 걸으며 삶과 사람들을 만나고, 끝끝내 따듯한 온도로 그들에게 닿길 바라며!


    이상, 지난 여행을 돌아보고 앞으로 내 여행에 대해 다짐하며 적어보는 것들이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니 S, 치우가 시그나기로 돌아왔다. 치우는 트빌리시로 향하는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 시그나기에서 하룻밤 더 묵어가야 한다며 역시 M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을 했다. 마침 내가 묵고 있던 방은 싱글베드 세 개가 있는 방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M 아주머니께서는 대뜸 나를 보더니 '굿 걸'이라 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조지아의 가정집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방 기준이 아닌 사람 기준으로 가격을 매겼기 때문이다. 전문 용어로 1타 3피라고 해야 하나.

    M 아주머니의 자본주의 미소에 대해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갔다. 허름하지만 맛있어 보이는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하고 숙소로 돌아와 차례로 샤워를 했다. 그날 밤, 같은 방 침대에 누워 각자 할 일을 하는 셋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좋았다. 혼자만 있던 방이 세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차 마음까지 포근해지는 걸 느꼈다.


식당 입구 / 아잘룰리 하차푸리 / 가지 요리 / 라면죽(?) 같은 요리 (고수 듬뿍이 포인트!)



시그나기 산책


    일찍이 숙소에서 아침을 만들어 먹고, 트빌리시로 향하는 마슈롯카에 치우를 태워 보냈다.  왠지 모르게 치우와는 다른 도시에서, 어쩌면 다른 나라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그나기의 유명한 식당 중 하나는 멕시칸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이 도시에 온 첫날에 홀로 방문했던 멕시칸 식당에 이번에는 S와 함께 갔다. 나홀로 여행의 최대 단점은 혼자 밥을 먹을 때가 많다는 점인데, 쓸쓸해서라기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다양하게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첫날엔 브리또 하나만을 시켜먹었는데, 이번에는 과카몰리와 파히타를 나눠 먹었다. 


과카몰리 / 칩 / 파히타


    너무나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식당 문을 나섰다. 곧바로 산책을 나가려다가 해가 너무 뜨거워 숙소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조지아에 입국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며칠 사이에 날이 따듯해져 계절이 여름으로 성큼 다가선 것을 느꼈다.



조지아 시그나기, 아기자기한 핸드메이드 제품들


    시그나기는 너무도 관광지였다. 현지인보다는 관광객들이 더 많이 보였고, 상업에 종사하지 않는 시그나기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트빌리시에서 만난 어떤 여행자는 "시그나기는 너무 관광지 같고 예쁘기만 한 곳이어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어." 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로컬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시그나기는 그리 좋은 여행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그나기의 집과 골목은 오래된 성벽과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고상한 멋이 있었다. 관광 도시이지만 시끄럽거나 요란하지는 않았고, 잠잠하니 아기자기했다. 여유가 있는 여행자라면 하루 이틀 밤 정도는 묵어가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곳이다.  


조지아 시그나기, 중심부


    S와 중앙 광장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가 남쪽 성벽을 따라 걷기로 했다. 걷다가 무척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 교회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높은 탑이 있어 올라가 보았는데, 갑자기 날이 흐려지는 바람에 전망이 그리 좋지는 않아 금세 내려왔다. 



조지아 시그나기, 남쪽 성벽 길


    남쪽 성벽길 끝은 산 길로 이어져 있었다. 전날 오전에 혼자 왔을 때는 조금 무서워서 산길을 코앞에 두고 돌아와야 했는데, 이날은 S와 함께 산보를 할 수 있어 좋았다. 탁 트인 풍경만 보다가 수풀이 우거진 산속으로 들어가니 촉촉하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동네 뒷길도 천천히 걸었다. 오후 늦게 기울어진 해가 노란빛을 잔뜩 비추니, 가지런한 골목길이 따스한 공기로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길가에는 늘어져 자고 있는 멍멍이들과 사람들로부터 몸을 피하지 않는 냐옹이들도 꽤 많이 보였다. '조지아도 동물들에게 너그러운 나라구나', 가방 속에 가지고 있던 사료를 꺼내어 마음껏 뿌려주었다.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며 집에 두고 온 안젤라와 칸이와 루루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늘에 널부러져있는 댕댕이들 / 고양이 사료는 언제나 내 가방 속에


    현지인과의 특별한 만남은 없었지만, 시그나기는 국경의 여독을 풀고 한 숨 쉬어가기에 적당했다. 지겹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고, 외로움을 느낄 새 없을 정도로 함께할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인연


    느긋하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S와 내 앞에 서더니 속사포 같은 말을 쏟아내며 S의 메신저 아이디를 받아갔다.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는데 남편과 함께 여행 중이라며 만나서 '여행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단정 지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말투나 제스처, 표정 등에서 어떤 느낌을 읽어내 버렸다. 여러모로 비슷한 S와 나는 G의 첫인상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다지 좋은 느낌을 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저녁이 될 때까지도 G에게서 별다른 연락이 없어 은근히 안심하고 있었는데, 차를 마시러 가는 도중에 G부부를 마주치고 만다. 저녁을 먹었냐고 묻기에 먹었다고 대답을 했는데, 아이코, 그분들도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라며 차 한잔 하러 가자신다. 평소 부부 여행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첫 느낌과는 다른 분들이길 마음속으로 바라며 그분들을 따라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주문을 하자마자 통성명도 하지 않고 본인들의 여행 일정을 처음부터 줄줄 늘어놓으신다. 동남아부터 시작해서 조지아까지의 여정을 한 시간 가량 프레젠테이션 하시고는 "딱 처음 보는데 우리랑 같은 과(?)라는 걸 알았어요. 배낭여행자들끼리는 왜, 통하는 구석이 있잖아요."라고 하신다. 중간중간 집중력이 흐려지고 레스토랑 옆 집에 묶여 있는 개가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데, S는 아주 흥미롭게 경청을 하는 듯했다.

    시그나기의 마지막 저녁 하늘이 저물어가는 동안 S와 나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G부부의 대화 받이가 되어 드렸다.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의 무용담만 실컷 듣고 온 것이다. 아름답고 고요했던 시그나기에서의 날들을 더 이상 훼손하고 싶지 않아, 숙소로 돌아와서도 S와 나는 G부부에 대한 말을 아꼈다. 음악을 틀어놓고 나나 민트 티를 나누어 마시며 밤하늘을 보기에 바쁘기도 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다른 도시에서 S가 문득 운을 띄웠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골라서 만나게 되는 게 죄책감이 들어요." G의 메신저 아이디를 차단하며, 요즘 들어 부쩍 불편한 사람들과 선을 긋게 된다면서 말이다. G부부 앞에서도 싫은 내색 않고 밝게 호응하던 S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쾌함을 감추고서라도 늘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려는 S라는 걸 알기에 "사람은 당연히 골라 만나야죠. S 씨 주변의 사람들이 S 씨를 설명하는 걸요."라고 답했다. S는 좀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도 충분히 선량한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G부부가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와 온도가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게스트하우스의 M 아주머니도 누군가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이전에 묵었던 손님이 히터를 너무 많이 틀어 전기세 폭탄을 맞았던 아찔한 경험이 있을지도, 그래서 그날만 내게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불편한 사람과 꾸역꾸역 인연을 이어 나가기에는 내 에너지가 한없이 부족한 탓이다. 함께 있는 동안 기운이 쌓이기는커녕 소비하게 된다면 그 관계를 오래 지속할 의지가 쉽게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G부부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첫 만남으로부터 정확히 5일 후에 트빌리시 자유광장에서, 34일 후에 메스티아의 한 식당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마주친 횟수를 생각하면 인연은 인연일 테지만, G부부와의 연이 조지아에서 다했기를 바라도 될까. 어째 묘한 죄책감이 마음 한켠에 자리한다.



조지아 시그나기, 저물어가는... 가만히 보고 있기에도 아까운... 시그나기의 마지막 저녁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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