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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이작가 Aug 22. 2019

아직도 문득, 울컥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도 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눈물이 흐르는 것은 절대로 막아지지 않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홍수쯤이라 여길 만큼.

그 누구도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쉬이 막을 수 없다.


본능이기 때문이다.

너무 웃긴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울컥 눈물이 목구멍에 차오른다면 그것은 저마다 가슴속에 가라앉혀 두었던 슬픔이 스펀지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마 무시한 짱돌을 슬픔 위에 얹어두어도, 가슴이란 바다는 작은 파도에도 쉬이 일렁인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죽음이 그럴 것이다. 가족과 이별했다고 내내 슬플 수 없고, 내내 슬픈 표정일 수 없다. 가족의 상을 치르고도 웃는 얼굴로 출근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금방 슬픔을 잊어서가 결코 아니다. 그 슬픔을 억누르고 삶에 복귀했을 뿐.  모니터를 보다가도 남몰래 차오르는 눈물을 훔쳐내야 할 가혹한 일이다.


나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이런 마음이겠구나 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처럼 어느 날 내 삶에서  뿌리째 뽑혀나간 '그'가 나에게는 꼭 죽은 사람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훗날 문득 기억이 떠올랐을 때 연인에 대한 감정은 변질된다는 것. 슬픔에서 원망, 어이없음 또는 후련함.. 종국에는 아무렇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죽도록 슬프지 않다는 것. 연인을 보낸 것 따위 길게 보면 티끌이다.


문제는 삶 전체에 걸쳐 맞닥뜨리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출생, 결혼, 사망과 같이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꼴깍 넘어가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 그 의식에 얽힌 슬픔은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다. 


나에게도 그런 슬픔이 몇 가지 있다.

아직도 그리 길지 않게  살은 터라 다 살아낸 이의 것에 비하면 적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앞으로 더 지워지지 않을 슬픔이 많아질 거라고 각오한다.


10대에는 더더욱 그런 슬픔을 만날 확률이 낮고,

20대에도 운 좋으면 가장 큰 슬픔으로 연인과의 이별이나 취업 낙방을 경험할 수 있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세상 슬픈 일이 된다.


30대에 이런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누가 예상했을까. 나는 30대에 출산과 이혼을 경험하고 나서야 진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게 진짜구나. 삶에 찍히는 낙인 같은 게 진짜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들은 아직도 문득, 여전히 나를 울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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