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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이작가 Jan 24. 2022

열심히 출근하고 싶지 않아 졌다.

워킹맘 에디터의 시간 값 따지기

언젠가부터 열심히 출근하고 싶지 않아 졌다.
예전엔 출근시간을 지키기 위해 간당간당한 순간엔 늘 최선을 다해 뛰었다. 무얼 위해 그렇게 바쁘게 뛰고 걸어야 하나. 30대 후반이 되고 8년 치 아이 엄마로서 살다 보니 이제는 어느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내가 뛰어야 하는 순간은 출근길 깜빡이는 신호등이 아니라 퇴근길 깜깜해진 골목길이었음을. 가족이 기다리고 내 아이의 수다스러움이 폭발하는 순간이 내가 좀 더 빨리 마주해야 하는 시간임을 알았다.


사무실에 좀 더 일찍 도착하는 몇 분짜리 여유가 결코 내 삶의 질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영리함을 의미했다. 직장상사에게 잘 보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내 직업의 존속이나 생계에 직결되지 않는다. 적당히 일하며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재미있게 할 때에 더 많은 돈이 따라붙는 세상이다. 가령, 유키즈의 진정성에 개그라는 모방성을 더한 터키즈가 유키즈만큼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놀라운 섭외력으로 유키즈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기하고 경이로웠지만, 나처럼 회사일과 집안일에 치인 워킹맘에게는 TV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시간에 부리는 사치였다. 오히려 짧은 편집본을 보거나 그것도 무리일 땐 모든 회차의 처음과 끝을 볼 수 있는 10분짜리 터키즈를 보는 게 더 좋았다. 그 조차 설거지를 하거나 샤워할 때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10분짜리 유튜브 영상에서 더 짧아진 '쇼츠'나 인스타 '릴리'처럼 세상은 분 단위로 쪼개지고, 인생에는 그만큼 짧게 건져내야 할 의미들이 많아졌다.


반면 아직도 예전 관습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은 20분쯤 일찍 출근해서 여유로운 아침을 맞는다. 문제는 시간에 딱 맞춰 움직이는 요즘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찍 와 있어야지.. 어떻게 저렇게 1분도 일찍이가 안되지? 어쩜 저렇게 딱 정시에 출근해?" 하는 라떼 사고방식을 가질 순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이제는 1분이 소중한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지난 가을쯤 화분을 사러 갔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철저히 시간을 값으로 매긴 것이 식물 값이라는 것. 그때 어른 주먹만 하게 자란 로즈마리는 3천 원, 팔뚝만 한 건 5천 원, 허벅지 만하게 올라오는 건 3만 원이었다. 누군가 저 식물을 키우는데 3개월, 5개월, 3년의 시간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 나는 적당해 보였던 5천 원짜리 로즈마리를 사 와서 겨울이 되기 직전까지, 웃자란 가지를 잘라먹으며 흡족해했지만 그해 로즈마리는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밑동부터 서서히 불타버리듯 허옇게 메말라갔다. 그러니 3년치 로즈마리가 3만 원인 건 무척이나 맞아떨어지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시간도 계산한다. 시간의 값. 시간의 가치. 나에게는 이제 전력을 다한 10분 이른 출근이 길고 긴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졌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 간발의 차로 떠나버리는 지하철을 쿨하게 보내버릴 수 있는 여유가 장착된 것이다. 반면 나는 늘, 퇴근길 집 앞의 신호등 불빛이 깜빡일 때는 초조하다. 빨리 집으로 가야 하니까. 저 불 켜진 창문 안엔 내 사랑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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