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출근하고 싶지 않아 졌다.
워킹맘 에디터의 시간 값 따지기
언젠가부터 열심히 출근하고 싶지 않아 졌다.
예전엔 출근시간을 지키기 위해 간당간당한 순간엔 늘 최선을 다해 뛰었다. 무얼 위해 그렇게 바쁘게 뛰고 걸어야 하나. 30대 후반이 되고 8년 치 아이 엄마로서 살다 보니 이제는 어느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내가 뛰어야 하는 순간은 출근길 깜빡이는 신호등이 아니라 퇴근길 깜깜해진 골목길이었음을. 가족이 기다리고 내 아이의 수다스러움이 폭발하는 순간이 내가 좀 더 빨리 마주해야 하는 시간임을 알았다.
사무실에 좀 더 일찍 도착하는 몇 분짜리 여유가 결코 내 삶의 질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영리함을 의미했다. 직장상사에게 잘 보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내 직업의 존속이나 생계에 직결되지 않는다. 적당히 일하며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재미있게 할 때에 더 많은 돈이 따라붙는 세상이다. 가령, 유키즈의 진정성에 개그라는 모방성을 더한 터키즈가 유키즈만큼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놀라운 섭외력으로 유키즈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기하고 경이로웠지만, 나처럼 회사일과 집안일에 치인 워킹맘에게는 TV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건 시간에 부리는 사치였다. 오히려 짧은 편집본을 보거나 그것도 무리일 땐 모든 회차의 처음과 끝을 볼 수 있는 10분짜리 터키즈를 보는 게 더 좋았다. 그 조차 설거지를 하거나 샤워할 때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10분짜리 유튜브 영상에서 더 짧아진 '쇼츠'나 인스타 '릴리'처럼 세상은 분 단위로 쪼개지고, 인생에는 그만큼 짧게 건져내야 할 의미들이 많아졌다.
반면 아직도 예전 관습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은 20분쯤 일찍 출근해서 여유로운 아침을 맞는다. 문제는 시간에 딱 맞춰 움직이는 요즘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찍 와 있어야지.. 어떻게 저렇게 1분도 일찍이가 안되지? 어쩜 저렇게 딱 정시에 출근해?" 하는 라떼 사고방식을 가질 순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이제는 1분이 소중한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지난 가을쯤 화분을 사러 갔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철저히 시간을 값으로 매긴 것이 식물 값이라는 것. 그때 어른 주먹만 하게 자란 로즈마리는 3천 원, 팔뚝만 한 건 5천 원, 허벅지 만하게 올라오는 건 3만 원이었다. 누군가 저 식물을 키우는데 3개월, 5개월, 3년의 시간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 나는 적당해 보였던 5천 원짜리 로즈마리를 사 와서 겨울이 되기 직전까지, 웃자란 가지를 잘라먹으며 흡족해했지만 그해 로즈마리는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밑동부터 서서히 불타버리듯 허옇게 메말라갔다. 그러니 3년치 로즈마리가 3만 원인 건 무척이나 맞아떨어지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시간도 계산한다. 시간의 값. 시간의 가치. 나에게는 이제 전력을 다한 10분 이른 출근이 길고 긴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졌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 간발의 차로 떠나버리는 지하철을 쿨하게 보내버릴 수 있는 여유가 장착된 것이다. 반면 나는 늘, 퇴근길 집 앞의 신호등 불빛이 깜빡일 때는 초조하다. 빨리 집으로 가야 하니까. 저 불 켜진 창문 안엔 내 사랑들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