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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루 Jul 14. 2022

면접탈락 메일이 오히려 좋은 이유

해외 워킹비자를 잠시 포기한 이야기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받은 한통의 메일에 적혀있던 큼직한 문장이다. 

대충 와꾸만 훑어보니 유쾌한 소식은 아니구나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약속을 잡는듯한 날짜나 시간 문구도 없고, 그저 지원해준데 대한 노고에 볼드체로 써가며 감사를 표하는 과도한 예절에서 직감한다. 

아! 떨어졌구나. 


대만에서 취직을 하고 한국본사로 발령온 뒤 다시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했다. 

이곳에 남긴 최근 근황이 올해 초, 대만에서 취직했다는 내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축약된 전개긴 한데 long story short 하자면 우선 그러하다. 


새로 이직한 곳은 꽤나 마음에 든다. 

워라벨이 대단히 있고(주35시간, 재택근무, 유연근무 등등), 사람들도 마음에 든다. 업무도 할만하며 회사가 복지로써 임직원을 대하는 애티튜드도 좋다. 무엇보다 배울점이 있어보인다. 


헌데 웬일인지 '이곳은 떠나야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켠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처음 이곳으로 이직하던 시절의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입사한지 얼마 안된 시점부터 채용공고사이트를 들락날락거린다. 

이곳으로 이직하던 시점의 마음은 어떠했는고?


당시 도망치듯 전직장에서 나왔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다.

근 6개월간 전직장을 그만둘 생각도, 한국에서 이직할 생각도 딱히 없었다. 그저 한국에서 목표로 하는 것들을 어서 처리하고 다시 대만으로 뜨는 것이 나의 목표라면 목표였다. 눈이 희번득해질 정도로 좋은 기회가 있는게 아니라면!


그러다 본사로 오며 회사생활에 문제가 많이 생겼고, 어렵게 얻은 대만 워킹비자를 포기하며 좋은 워라벨과 근무여건의 직장으로 옮기게 된것이다. 

그렇다고 대만을 비롯한 해외 직장살이에 대한 니즈를 버린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바라고 있다. 그러기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 


tmi를 풀자면, 본사로 오며 바뀐 직무가 중간도 없이 너무 힘들어지고 직장내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 사고가 정지되어버렸더랬다. 

매일 10시퇴근은 기본이고, 혼자 아등바등해도 그만한 노고에 대해 한 인정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너무 바빠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의 매 시간은 전쟁터와 같았고, 회사 밖 일상생활은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다시피 했다.

하루는 샤워중에, 머리가 지금 젖어있는데 샴푸를 한건지 안한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샴푸를 했다. 그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합리적이고 전략적이고 집약적인 사고가 어려워지자 내가 나선 행동은 우선 숨쉴 구멍을 만들자는것. 밤 10시 집에오는 버스에서 찰나의 생각이 스쳤고 바로 집에와서 탐색 후 눈에 보이는 한 곳에 지원서를 그날 바로 제출했다. 

결과적으로 그 곳에서 면접제의를 받고 최종 오퍼를 받게 되었다. 재택근무, 유연근무, 주35시간, 식대제공 등 너무나 매력적인 근무 조건이었고 현직장보다 연봉도 더 많았다. 그야말로 안갈 이유가 없었다.


헌데 막상 다른 숨통이 트이니 가지고 있던 떡이 아쉽게 느껴졌다. 

나 분명 다시 대만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직을 하면 사실상 당분간은 합당한 워킹비자를 받고 대만에서의 생활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질테였다. 대만 워킹비자가 갖는 가치가 어떠한지(외국인이 대만 학적 없이 워킹비자를 받기란 쉽지 않다. 대만 현지인의 2배에 달하는 연봉 수준을 만족시켜야 하는 등 대만 급여체계를 고려할때 그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 너무 잘 알았기에 , 잠시 사고에 숨통이 트이고 감정이 걷히니 다시금 상기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직의 결단을 내렸던 당시의 심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우선 숨통이 트이는 곳으로 먼저 옮기자. 그곳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중요한 내 일들을 처리하며 잠시간 한국에서의 '삶'을 갖자.

2)해외 직장생활을 위한 발판을 다시 모색하자. 맨땅에 헤딩하듯 현지에서 그 어려운 워킹비자를 받고 취업을 해봤으니 두번째도 해낼 거다. 기한은 올해 10월까지로 한다(원래 다시 대만을 가기로 했던 시기)

3)모든 걸 다 떠나서, 좀더 규모있고 처우가 좋은 곳으로 부단히 올라가야 한다는 약간의 조바심을 존중하자. 


채용 이후 약 두달이 지난 지금 실제로는 어떠한고? 

결론부터 말하면 1번은 오케이. 2번은 오...케이?!

행동력이 생각보다 파워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일을 진척시키고 있다는 면에서 1번 니즈는 해소하고 있다. 

2번은 생각보다 막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기회가 없는것 같지는 않은데 웬일인지 대만에서 잡을 구하던 것보다 더 장벽이 있어보이고 압도된다. 현지채용이 아닌 까닭일까? 아님 선택지가 많아서? 당장 싱가폴로 가야할지 중국으로 가야할지, 미국 일본으로 가야할지도 채용공고 필터를 선택할 때 부터 난관이지 않은가. 

내 직무가 핏한가? 외국어가 충분한가? 등 자꾸 안되는 이유에 대한 생각이 붙게 된다.

이건 가난한(꼭 경제적인게 아니어도) 자의 마인드인데, 될 이유를 찾고 밀어 붙여야 되는데!


일단 완수해야할 업무가 있으니 이를 얼추 궤도화 시키고 그 다음 스텝을 도모하는게 어쩌면 맞는 순서일 수 있겠다. 지금 당장 이력서를 넣어서 해외 발령이 확정난다해도 바로 당장은 어렵지 않은가? 이런것을 보면 난 메타인지가 정말이지 한참이고 떨어지는 듯 하다. 





그러던 중 예전부터 흠모의 대상이던 IT계열 외국계 대기업에서 나름 핏한 직무로 채용을 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일의 시점, 직무 등 모든게 딱 맞아 떨어지는 듯 했다. 수시채용이고 공공연하게 공고가 나간것 같지도 않아 잘 해보면 될법도 해보였다. 이전에도 지원해서 떨어진 경험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 난 이전과 다르지 않은가? 나름 레벨업을 했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쪽에서도 이정도면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까? 하는 근자감이 싸악 온 몸을 감쌌다. 

근자감이라 표현한 이유는 정말 그야말로 막연한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잘하는 외국어가 둘이나 늘었고, 이런저런 경력도 늘었고, 최근 회사들도 구직 시작하고 거의 바로 붙다 시피 했으니 말이다. 회사라는 곳이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곳이 아니라는 걸 겪어보고 알게된 것도 있을테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회사가 유능하게 봐줄지에 대해선 합리적 근거가 없다.


처음 채용공고를 본날 밤 지원서를 내면 딱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나에 꽂히면 바로 돌진하는 타입이면서 그러지 않은 이유는 어딘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내가 여기 지원하는게 맞는가? 그래서 여기로 옮기면 뭐 어떻게? 해외 가고 싶다는 녀석이? 이력서를 다시 작성해야한다는 압도감도 분명 있었을 테고 말이다.

말로 하려니 다 구차한 변명들인데, 그때는 그러했다. 어쩌면 무기력에 뇌가 절어있던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 뇌를 빨리 다시 성장형 방식으로 최적화 시켜놔야할텐데. 


그러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좋은 기회인것 같다는 생각에 이력서 작성에 착수했고, 한참을 지나도 채용공고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나도 한참을 들여 이력서 작성에 매진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력서를 써야한다는 부담감을 지닌 채 미루고 미루다 하루에 좁쌀만큼 쓰는 생활'을 연명했다. 그렇게 공고를 본 이후 장장 한달이 되던 시점에 마침내 이력서 제출에 성공했다. 



이건 정말이지 결과를 떠나 제출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 도전이었다. 말하자면 나와의 도전인 셈이었다.

언제부턴가 (어쩌면 대학교 막학기부터 그 전조는 있던 듯 하다) 양이 많고 쥐어짜내야 하는 일(주로 글쓰기, 기획하기)에 압도된다. 옛날 같으면 단전의 힘으로 단번에 그날 밤안에 해치워버렸을 일들이 지금은 직면할 '힘'이 딸림을 느낀다. 

비실비실한 손가락으로 깨작깨작. 워라벨은 또 중요해서 무리해서 밤을 지새우겠다는 오기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아 네월아 하며 오랜 기간 겨우겨우 해낸다. 

아니다, 해내면 양반이고 대부분 못해내는 것이 많다. 이 모든게 나의 효능감, 자존감을 갉아먹고 무기력을 양산하는 아주 치명적인 원흉이 되었다.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앗아가는 이 녀석, 타파하면 분명 신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돌아와서, 이번주가 그렇게나 자유롭고 해피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주말에 약 한달여의 묵은 채찍이 싹 사라졌지 때문이다. 그리고 화요일, 탈락 소식을 접한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크게 중요하지 않을거라 했지만 그래도 탈락의 고배는 언제나 유쾌할 수 없다. 



헌데 이번의 탈락은 이전과 느낌이 좀 달랐다.


1)생각보다 엄청 쓰지 않았다. 

탈락 메일에는 '어쩌고 저쩌고 인력 배치의 문제로' 귀하를 모실수 없게 되었다고 했는데, 옛날 같았으면 보이지도 않을 문구이지만 지금은 그게 사실일것으로 믿고 있다. 내가 마음에 안들어서라기보다 이미 사람을 뽑았구나, 싶었다. 설령 마음에 안들었던것일지라도 타격감이 크지 않다. 내가 더 뛰어나지 않아서라기 보단 그들이 원하는 양상에 핏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이 된다. 다른 각도와 입장에서 나를 볼 때 충분하기에 계속 고용되는 것일 테니까. 입사지원을 하며 난 그저 '나를 써보아라'제안을 한 것이고, 그쪽에서는 '거절'을 한 것일 뿐이다.이 관점의 변화가 대단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력서를 쓸 때도 나를 지배했던 감정인데, 그래도 너무 티내면 안될것 같아서 자제하느라 애를 먹었다. 


2)어쨌든 도전은 무조건 옳았고, 탈락해서 오히려 좋다.

의도한건 아니지만 이력서 제출이 난데 없는 무기력 타파 챌린지로 변모한 까닭에, 이력서를 제출함으로써 나의 효능감은 +1 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를 좀 덜 끌고 단시간에 끝냈다면 훨씬 아름다웠겠지만. 이력서를 끄적거리다가 제출도 못하고 무력감에 져버리는 것보다야 훨씬 훨씬 낫다. 역시 난 완벽주의가 아니라 완성주의가 맞다. 완성주의라서 오히려 더 삶을 사는데 유리한 듯 하다. 완성만 하면 이렇게나 밀도있는 행복감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나의 경우는 부족하지만 실행력의 측면에서도 우위에 있고 말이다) 



또 이 제출이 좋았던 이유는 뭔가라도 탐색하고 도전을 하고 있다는, 안주하고 고여있지 않으려 물장구를 계속 친다는 '느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느낌이 되게 중요한데 1) 우선 무력감에서 벗어나 효능감을 계속 확인할 수 있고 2)부단한 물장구의 리듬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2번은 '끈을 놓지 않는다' 표현하는게 더 알맞을 듯 하다. 생각의 끈과 행동의 끈은 매우 밀접해서 뭐라도 조금씩 하는게 그 일을 결국 달성하는데 분명 큰 차이를 만든다. 

1번에 대해서, 가만 보니 나는 참으로 무기력, 무력감과 많이 투쟁하는 듯 하다. 나의 발버둥은 어쩌면 모두 그 녀석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고 할만큼이다. 그만큼 그것들에 취약하고, 또 그만큼 그것들을 극복할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럼 탈락해서 오히려 좋은 이유는, 일단 지금 회사에 한동안 계속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급했듯 난 지금 회사가 꽤 마음에 든다. 그저 '좀더 나은데로 나아가야지'하는 성장욕구 (이쯤되면 강박같기도한 이것)로 인해 이직 생각을 하는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다. 이를 위해서 좀더 이곳에 있어한다는 것을 분명 안다.

이처럼 이번의 도전과 좌절(?)이 '여기서 빨리 나가야한다'와 ' 좀더 있어야한다' 의 양 극단에 있는 생각이 양립하는 최고의 시나리오라는 점에서, 이번 도전과 결과는 의의가 있다. 지원했는데 떨어진 것 아닌가! 

'떨어진 김에 더 핏한 나은 기회를 모색해본다'는 것이 골자이다. 여기서 더 배우고, 또 좀더 이상적인 직장을 모색해볼 시간을 벌었다. 좋다. 오히려! 




지금은 낮 12시다. 11시정도 느즈막히 출근하려 했는데 급하게 화상미팅이 들어와서 그거 마치고 이제 슬슬 회사에 가보려 한다. 회사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도착 후 회사돈으로 점심을 사먹으며 집중해 일하다가 5시쯤 볼일보러 퇴근할 계획이다. 참고로 이 모든 행위에 있어 그 누구의 허락도, 눈치도 받을 일이 없다는것, 참고로 난 이제 입사한 2달차 직원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직장생활이란 말인가? 1분 지각했다고 시말서를 쓰던 시절에는 꿈만 꾸던 일이다. 그런곳이 있을까? 혼나면서 매일 상상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믿기 힘든 하루하루다. 

아직은 더 물씬 누리면서, 기회를 도모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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