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가상세계가 만드는 리얼리티, 구미식
극단 돌파구의 신작 <구미식>은 동시대 사회·정치적 혼란을 블랙코미디와 초현실적 패러디로 풀어낸 작품이다. 보수적인 가상의 지방도시 ‘구미시’를 배경으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등을 패러디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2024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구미식>은 지난 2월 21일부터 3월 2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구미식>은 전통적인 연극과는 다른 파편적인 이야기 구성과 서술 중심의 진행 방식이 특징적이다. 연극 중간중간 화려한 광고, 팝업창, 라이브 방송과 같은 디지털 환경의 요소들이 삽입되며 극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본 글에서는 <구미식>의 연출적 요소를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실험적 연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특징 중 하나는 서사적 연출보다는 서술적 연출이 강조되는 방식이다. 구미식 또한 이러한 특징을 지니며, 인물들이 극 속 캐릭터로 존재하면서도 해설자의 역할을 오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예를 들어, 로라는 극 중 캐릭터로서 연기하다가도 불쑥 관객에게 말을 걸며 연극의 구조와 맥락을 설명한다. 이러한 메타적 기법은 관객이 ‘구미’라는 가상의 세계와 현실 사이를 오가게 만들며, 극적 몰입을 방해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관람 방식을 유도한다.
또한, 무대장치나 오브제를 최소화하는 미니멀리즘 연극의 특징을 띠고 있다. 극 중 캐릭터들은 장면 전환에 맞춰 자연스럽게 옷을 갈아입거나 다른 인물로 변신하지만, 공간적 배경은 조명 외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새마을운동기념공원과 같은 주요 공간은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구현되지 않고, 관객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관객이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극에 개입하도록 만든다. 관객은 조명이 바뀌고 새로운 장면이 열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다양한 공간을 형성하게 되고, 이는 연극적 경험을 확장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구미식은 의도적으로 맥락을 배제하고 현실과 허상을 겹쳐 놓으며 극적인 혼란을 연출한다. 광고, 팝업창, 강렬한 네온사인, 갑작스러운 노래 등 압도적인 시각적·청각적 요소들이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며 감각을 자극한다. 현대 연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험적 접근 방식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연출이 모든 관객에게 동일한 울림을 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특히, 필자는 감정보다는 혼란스러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많았다. 분절된 이야기와 과잉된 시각적 요소들이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정보의 과부하를 일으키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극적 장치들이 의도된 연출 방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구미식의 서사적 특징이자 연극적 실험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관객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형식적 실험이 극의 메시지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게 느껴졌다.
가상의 지방도시 ‘구미시’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과 동시대의 정치·사회적 불안을 담아내며, 우리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새마을운동기념공원에 세워진 ‘행복한 동상’은 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다. 행복한 왕자의 동상을 패러디한 이 조형물은, 주인공 톰을 ‘제비’로 만들어 보석을 나누게 하지만, 결국 그 대가로 주어진 것은 마약이었다.
마약에 취한 톰은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비극적인 사건 속에 휘말린다. 하지만 그의 환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과거 회상,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는 극도로 현실적이다. 마약, 정치, 윤리, 계엄령, 교육과 같은 문제들은 극 중 내용을 우리의 현실과 덧대어 비교하게 만든다.
특히, 극 중 계엄령 설정이 2024년 12월 3일 실제로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더욱 흥미롭다. 작가는 구미식의 원고를 2022년에 완성했으며, 이는 의도치 않게 현실과 맞물리게 되었다. 이러한 지점까지 합쳐져 구미식의 가상세계는 역설적으로 리얼리티와 가까워져간다.
결국, 구미식의 가상세계는 환상으로 도망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바로 이곳을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리얼리티의 공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