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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네마진국 Jul 22. 2024

프리랜서의 은밀한 고통

  영화, 드라마 현장에서 다신 일하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독립 영화 일이 끝나고 나는 웹드라마 연출팀 일을 시작했다. TV와 극장만 존재하던 국내 영상 콘텐츠 시장에서 유튜브와 OTT가 등장했고 자연스레 제작되는 작품의 수도 늘어났다. 여전히 메인 스트림으로 들어가는 건 어려웠지만 변두리의 작은 작품들에서 일할 기회는 많았다. 이런 흐름 덕택에 나 역시 쉽게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프리랜서가 되었다. 


  프리랜서. 단어에서 뭔가 멋진 느낌이 난다. 일단 영어인 데다 ‘Free’는 자유가 아닌가. 어느 곳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것만 같다. 내가 원할 땐 여행을 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는 그런 삶.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고 일이 없으면 모아놓은 돈이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삶. 물론 내가 모든 프리랜서의 근무 환경을 알진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저예산 웹드라마나 영화, 드라마 환경이 어떤지 조금은 안다. 


2018년 드라마 연출팀으로 일할 당시 찍은 사진 (혹시 몰라 얼굴은 포토샵으로 바꿨다)

  

  이쪽 일의 장점이자 단점은 매번 다른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정된 직장이 없기 때문에 작품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일을 한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꾸준히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많진 않다. 그래서 일을 시작할 때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계속 입증해야 한다.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특성이 어떤지 매 프로젝트마다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내향적인 성격의 나에겐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것까진 괜찮다. 진짜 문제는 업무를 나누는 일이다. 여기서 권력 다툼이 발생한다. 권력 다툼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는데 사실 일 떠넘기라고 보면 된다. 각 부서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일을 덜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거다. 영상 제작을 할 때 각 부서가 맡은 일의 경계가 모호해서 생기는 일이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에 떨어지는 공을 두고 누가 잡아야 할지 헷갈려하는 상황이다. 두 선수 중 하나가 “마이볼”을 외치며 공을 잡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공을 잡지 않으려 한다면? 급기야 서로 네가 잡으라며 실랑이까지 벌인다면? 뜬공으로 아웃될 수 있던 타구는 안타가 되어버린다. 상대팀 타자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1루로 진루한다. 이런 일이 작은 규모의 촬영 현장에선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소매치기를 당하는 장면을 촬영한다고 가정해 보자. 촬영 전에 소매치기범이 낚아채 갈 가방을 준비해야 한다. 여기서 가방은 어느 팀이 준비해야 하는가? 소품팀? 의상팀? 보통 화면 안에 나오는 모든 물건 그러니까 촬영 장소에 세팅할 물건들과 배우가 연기할 때 집거나 사용하는 물건들은 소품팀이 준비하고 배우가 입는 옷이나 액세서리류는 의상팀이 준비를 한다. 그럼 소매치기범한테 뺏기는 주인공의 가방은 소품인가 액세서리인가? 배우가 집는 것이니 소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맞는 대답이다. 하지만 이 가방이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주인공이 메던 가방이라면? 그럼 다른 장면에서는 의상이 되지 않겠는가? 이 지점에서 서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두 팀은 실랑이를 하게 되고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져 매번 얼굴을 볼 때마다 으르렁대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갈등을 조정하는 사람이 연출팀이나 제작팀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감정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허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팀이 연출팀에게 일을 떠넘기기 때문이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팀과 기싸움을 해야 한다. 


  일하는 시간도 길다. 주 52시간? 연출 제작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순수하게 촬영하는 시간만 주 52시간을 넘기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기술팀(촬영팀, 조명팀, 녹음팀, 그립팀 등 장비를 운용하는 팀들)들은 비교적 쾌적하게 근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출 제작팀, 소품팀, 의상팀은 촬영이 없는 휴차에도 일을 한다. 연출팀은 다음 촬영에 준비할 것들을 각 팀에게 전달해야 하고 스케줄도 정리해야 해서 쉬는 날에도 문서 작업을 한다. 제작팀의 경우 새롭게 추가된 촬영 장소와 스탭들이 식사를 할 식당도 섭외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일주일에 6일이나 7일을 일할 때도 많고 쉬는 날에도 연락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촬영 일정은 항상 유동적이라서 쉬는 날 약속 잡기가 힘들다. 지인과 미리 잡은 약속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영화, 방송 스탭의 애인이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해 끝내 이별을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대신 돈은 꽤 받는다. 연출 제작팀의 페이가 기술팀보다 적다는 사실은 조금 분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나이대 사람들보다 조금 더 돈을 받는 편이다. 일하는 동안 사생활이 없으니 시간을 돈으로 교환하는 셈이다. 일할 때 빡세게 하고, 촬영 후에 편히 쉬면 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게 쉽지는 않다. 내가 쉬기 위해서 일을 거절하려면 제법 용기가 필요하다. 그 일을 거절하면 언제 다른 일이 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두 달만 쉬려고 했는데 여섯 달을 쉬어야 할 수도 있다. 쉬는 동안 밥도 먹고 월세도 내야 하는데 일이 없으면 무척이나 곤란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쉬지 못한다. 


  스탭으로서 계속 일하고자 한다면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당신이 창작자가 되고 싶다면? 감독이나 작가가 되고 싶다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내 것’을 창작할 시간은 없고, 심지어 삶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많은 작품들을 보고 읽으며 생각하고 또 직접 만들어 보며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다 보면 창작 능력은 점차 무뎌진다. 창작은 우리 몸의 근육과 같아서 꾸준히 운동을 하면 점점 강해지지만 쓰지 않고 놔두면 금세 약해진다. 일을 잠시 쉬는 기간에 시나리오를 써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또 다른 작품에서 연출팀으로 몇 달간 일을 한다. 일이 끝나고 다시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면 그전에 겪었던 시행착오를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니 근육이 붙을 수 없다. 항상 제자리를 걷는 느낌이다. 


  그러다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남의 작품을 만들어주며 안락하게 지낼 것이냐 아니면 내 작품을 만들며 궁핍하게 지낼 것이냐. 무모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면 후자를 선택한다. 내가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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