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기운에 생기가 피어오른다. 한세월 길게 겨울잠 자고 깨어나니 글 향기 가득한 오솔길이 열린다. 봄빛 타고 온 그 길을 따라 느슨하게 발길 옮겨본다.
문예창작과를 지원할까 하며 망설였던 옛 기억이 머리에 스쳤다. 잊고 살았던 그 날의 열망이 아직 식지 않았기에 다시금 글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내 삶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한 세월 단단히 살아왔노라고 자처했지만 뒤척이며 삐뚤삐뚤 걸어온 궤적 곳곳에 허술한 빈칸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무기력했던 지난날의 공백을 메워 보려고 내 생의 반려가 되었던 잡다한 일들을 담담히 꺼내 보았다. 소소하지만 생활에 묻어있던 즐거운 일, 반가운 일, 놀라운 일들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끌어낸 삶의 소음을 부추기며 내적 성찰을 더했다.
시대의 격랑에서 한 발짝 물러난 세월 동안 도전과 좌절이 남긴 삶의 흔적을 더듬어갔다. 감각이 둔해진 사유의 공간 구석구석을 살피고, 어릴 적 고향의 추억을 매만지기도 했다. 생활의 굴레 속에서 발견한 작은 교훈이 인생의 깨달음으로 승화되기를 소망하며 시간과의 싸움과 미래의 두려움에 맞서 부단히 질문을 던졌다. 유년기에서 노년기까지의 긴 시간의 여정만큼 숙성된 이야기를 새로운 감각으로 조명해 보고, 꼭대기까지 차 올랐던 던 잡음도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묘수를 부려 옛날을 회상하는 기억의 연속성으로 단장해 보았다. 이들 흩어진 가닥을 가다듬으면서 언어의 미감을 얻어 맘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글 그릇에 주워 담았다.
2018년 봄, 그렇게 어렵사리 써온 글들이 ‘신간 서적’이라는 호사스러운 옷을 입고 수필집 『소심 소심 소심』으로 세상 밖에 나왔다.
며칠 전 수필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수필 창작을 고취시키고 수필 문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된 이 날 모임에는 전국의 수필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매년 우수 수필가를 선정해서 시상하는 ‘올해의 수필상’ 시상식이 있었다. 한 아름 꽃다발을 안은 두 수상자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많은 날을 고뇌하며 글을 만들어간 작가의 애환이 뜨거운 박수갈채에 말끔히 지워지고 행복으로 승화되는 뿌듯한 장면이었다.
이날 ‘한국 수필의 반성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임헌영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에세이 문학이 다른 장르의 문학보다 독자층이 많아서 전망이 낙관적이고 지금이 바로 수필의 황금기가 도래한 시기라는 것이었다. 가장 두터운 연령층을 확보하고 있는 수필은 작가의 연령도 점점 높아져서 7, 80대 노년층의 에세이가 붐을 이루고 있고, 심지어 100세 가까운 고령층의 필자들이 다룬 인생살이 저서들이 베스트 목록에 오르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노년 에세이 붐’으로 인해 수필의 서점 내 판매 점유율도 점점 상승 궤도에 있다는 달콤한 소식에 내 귀가 쫑긋해졌다. 과연 100세 시대 인생과 수필의 수명은 함께 하며 무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 옆에 앉아서 행사를 지켜보던 후배가 물었다.
“선배님, 이번 수필집은 몇 번째로 출간하신 책인가요?”
“응, 내 첫 번째이면서 마지막 책이야.”
그러자 후배는 정색하며 말한다.
“아까 들으셨죠? 선배님 수필 쓰기는 바로 이제부터에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물꼬를 트며 달라지고 있는 수필의 급류 속에서, 뒤처진 듯 구태의연한 글을 내놓고 마음이 무거웠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는 시간의 속도에 나이를 실감하고 풀이 죽어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지’ 하며 자괴지심으로 붕괴하는 요즘의 나에게 후배의 충고는 단맛이었다. 잠시 잃었던 감성이 가시거리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도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새롭고 항상 무엇인가 찾아다니는 여정은 한결같다. 삶의 동력을 발견하려는 기민한 정신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감수성은 청소년만큼이나 예민하며, 사물을 마주하는 태도는 아이들 마냥 꾸밈이 없다. 멀리 남겨두었던 오래된 기억의 서술은 아직 마르지 않은 수채화처럼 생기롭다.
누군가의 하찮은 글 속에도 넋이 서려 있듯, 한 사람의 진부한 삶의 이야기는 그의 영혼을 밝혀준다. 이제 시대와는 거리를 둔 삶에서 자신을 정화하고 싱싱한 감각을 끌어안아 미숙한 신분이 돋보이도록 칠보단장 해야겠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의 기록이 면경(面鏡) 같은 지면에서 진정한 언어의 맛을 내면서 많은 독자와 소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수준에 못 미치는 밋밋한 이야깃거리로 가득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공감해 준다면 다시 벌떡 일어나 또 다른 세상의 출구를 향한 갈망과 열정으로 뜨겁게 몸을 덥히고 싶다.
“어디, 다시 한번 시도해 봐? 수필집 제2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