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탐정의 '의심'은 결국 '이해 불가'로 끝났다 .
스마트폰이라면 죽고 못 사는 11살 딸이 언젠가부터 폰을 집에 두고 다니기 시작했다. 잊어버린 건가 해서
물어보니 그냥 집에 두란다. 리얼리? 안 믿겼다.
큰 딸이 폰을 달라고 조른 건 초등학교 1학년 보다 전이었다. 아이는 그 안의 게임부터 시작해서 유튜브, 카톡 같은 앱들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쉽게 익혔고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도 더 빨랐다. 유튜브나 게임이 개인적으로 보는 기능을 한다면, 카톡은 친구들이 필요한 것이기에 딸은 단톡방에 가입했고, 친한 친구에게
로블록스 같은 게임을 하자며 계속적인 요청이 오니 한동안 거기에 빠져있었던 게 2학년 즈음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쓰던 그 낡고 느린 폰을 보물이라도 된 것처럼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자기 실수로 방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다가 폰이 깨져서 한동안 못쓰게 되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이 난다. 부딪힌 자기 몸이 아픈 것보다 좋아하는 핸드폰을 못쓰게 되었다는 사실에 목 놓아 울었다. 아이의 핸드폰 액정은 완전히 부서져서 안에 있는 내용이 하나도 보일지 않을 정도였는데, 간신히 그 안에 친한 친구 전화번호를 읽어 종이에 옮겼다. 딸은 그 안에 있는 사진이며 친한 친구 전화번호를 잃어버리면 어떡하냐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렇게 한 달 만에 얻게 된 폰인데, 불과 6개월이 지났는데 이제는 들고 다니지도 않고 심지어 친구들하고 카톡도 안 하고 전화도 하지 않는다고? 거기다가 아이 아빠가 기능이 떨어진 것 같다고 새 폰으로 교체해 줄까 이러는데, 거절했다.
확실히 예전보다 관심이 떨어진 것이다. 물론 옆에서 보던 초 1 동생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바로 "저 주세요~"라고 조르더니 24년형 새 중고폰을 받아갔다. 그렇게 큰 애는 동생이 자기보다 더 좋은 폰을 가졌는데도 딱히 부러워하는 태도도 없다. 좀 이상하다.
스마트 폰이 아이에게 좋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떼어놓을까 고민하고 살던 나이지만, 문득 평소에 하던 행동과 다른 패턴을 보이니 뭔가 이상했다. 나는 눈치챘다. 이건 친구관계의 빨간 등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누군가에게 전화 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받고 싶지 않은 상태라는 걸.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폰을 찾긴 하는데, 오로지 쇼츠에 빠져있다. 게임도 카톡도 대화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방에서 멍 때리고 보다가 엄마가 숙제하라면 숙제하고 수학학원에 다녀오고, 줄넘기 학원에는 동생이랑 같이 간다. 그리고 아침이면 가기 싫은 학교지만 어쩔 수 없이 간다.
주말에 계속해서 비가 왔다. 아이들은 집에 갇혀서 보드게임을 하다가 자기들끼리 놀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만들기를 하다가 그럭저럭 놀았다. 할리 갈리 게임을 딸 둘이랑 셋이서 하다가, 슬쩍 운을 띄워보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애들이랑 게임해?" "아니, 나만 끼면 자꾸 뭐라 하는데. 안된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 그래서 노는 거 그냥 지켜보고 관찰해". 그 말에 딱히 대답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아는 딸은 누구보다
게임을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다. 시켜만 준다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놀 준비가 된 아이다. 그런 아이가 친구들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니, 대체 이유가 뭔가 싶었다. 딸은 말했다. 반에서 딱히 친한 애가 없다고.
그 말을 듣고 한 동안 마음속에 딸의 말이 마음에 남아 생각해 보았다. 작년까진 어땠는지. 3학년까진 단톡방도 열심히 들어갔고, 자기를 괴롭히는 남자애들도 한 두 명은 있었지만 주변에 여자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 아이들과 무인 키즈카페에 가서 파티하고 스티커사진 찍고 놀라고 해 줬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작년에 비하면
저조한 대답이었다. 올해는 생일 파티 겸 해서 친구들과 놀라고 해도 부를 아이가 없다고 대답해버리고 만다.
뭔가 이상한 대답이었다.
사찰. 엄연한 의미로는 국가 권력이 개인을 행동을 감시하는 행위를 뜻한다. 불법의 냄새가 풍기니 별로 좋은 단어는 아니다. 그러니 그냥 부모의 행동 관찰 정도라고 이름을 붙이자. 그렇게 딸은 '예의 주시' 단계 대상이 되었다. 나도 이미 지나 봤지만 10대에 접어든 아이들이란, 어떤 문제가 생겨도 부모에게 딱히 말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수습능력이 그렇게 좋진 않다. 결국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니 조사에 들어갔다
나는 약간의 사태파악을 목적으로 학교에 간 사이 카톡 대화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비번조차도 내가 알 수 있는 걸로 걸어놓는 딸에게는 딱히 감추고자 하는 태도가 없는 듯 보였다. 열린 판도라의 상자에는 딱히 뭐가 없다. 카톡 대화라고 할 의미 있는 건 거의 없다.(그게 더 이상하다) 단톡방 채팅도 없다. 고작 학원에 갈 때 친구와 연락한 정도다. 다만 1명과의 대화에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뭐 사이버 괴롭힘이나 익히 아는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었다. 친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친구는 작년부터 알던 친구로 4월에는 생일파티에 갔었던 친구다. 그런데 계속해서 연락하고 싶어 하고 문자를 봐달라고 하는 친구의 태도에는 큰 오해라고 할 요소가 없어 보였다. 반면에 계속해서 연락을 안 받는 쪽은 딸이었다. 둘의 커뮤니케이션은 계속해서 어긋나고 깨지고 있었다. 누군가 전화하면 안 받고 다시 전화하면 친구가 안 받고 서로 어둠 속에서 하는 대화나 다름없는 불통 메시지의 연속.(요즘 말로는 읽씹) 어른들이 아니어서 그런가 심지어 이런 불통메시지가 한 달 내내 오갔는데 결국 친구의 답변으로 끝을 맺었다. 나 이제 연락 안 할게.
그렇게 둘의 카톡메시지는 끝났다.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떡볶이를 해주면서 슬쩍 운을 띄어봤다. 그 친구 이야기를.
"00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어?"
"어 자꾸 나를 피해. 다른 여자애들 둘이랑 놀다가 내가 오면 입을 싹 닫더라고. 그래서 나도 더 이상 걔랑 상대를 안 해"
그동안 마음에 잔뜩 쌓아놓은 것을 터뜨리듯이 딸은 힘주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왜 그런 것 같아?"
"잘 모르겠어. 그전엔 왜 학원에 자꾸 몇 부에 오느냐고 전화하고"
"정말 왜 그런지 생각해 봤어?"
딸은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다.
속으로 답을 알려주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순진한 눈 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간접적으로 안 정보가 독이 되어, 오히려 이 아이들의 세계를 다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빠졌다.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걸까. 뒤 틀린 소통과 대화는 원하는 않는 친구와의 대화를 미묘하게 끊어가는 과정이 요즘 애들의 진짜 의도인지도 모른다. (미묘한 자존심 게임인 걸까)
어쩌면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내가 과거에 알던 딸보다 훨씬 큰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눈치나 사회적 감각은 누군가 가르쳐준다기보다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 답이니, 거기까지만 하기로. 내가 폰을 봤다는 걸 알면 딸은 아마 나에 대해서도 믿지 않을 것이기도 했다.
딸의 진짜 관심사는 그 친구에게 가있지 않았다. 딸의 관심사는 원래 베프라고 불렸던 단 한 명의 친구였다.
"걔도 나랑 연락을 잘 안 해. 만나도 나한테 예전처럼 친한 반응이 없고. 피하는 것 같아"
나는 넌지시 힌트를 주었다. 4월에 생일 파티에 갔던 멤버 중에 베프와 딸이 있고 너와 불통인 그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베프에게 너와의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고. 원래는 감정 섞인 뒷담이 옳지 않지만 전에는 안 그러던 베프가 나에게 피하는 반응을 보인다면 가능성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고.
딸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학기 초에 학부모총회 시간 등에서 학교폭력방지 방안이나 사이버 불링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었지만,
막상 딸의 고립을 접하고 나면서 느낀 점은, 이 실타래가 한 방향에서 풀어서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는 생각이었다. 학교문제란 친구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내 아이가 옳고 다른 아이가 틀리다는 식의
생각은 옳지 않았다. 내 아이에게도 뭔가 요인이 있었고 '뭐가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하자 잠시 혼란스러웠다. 고전적으로 그 친구에게 대화를 해서 오해를 풀라고 말을 하는 게 옳을까? 그 친구가 받아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그것 조차도 딸의 선택이다. 나는 뒤틀린 카톡대화 속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요즘 아이들 속마음만 느끼고 팽 당한 기분이었다.
결국 진실은 카톡대화도 아닌 그 세계 넘어 아이들 속 어딘가에 있었다.
오히려 과거 머리채 잡고 싸우던 시절, 너 왜 나한테 그러냐고 울고 불고 싸우던 아이들이 더 순수했다는 것을.
어떤 교육학자가 말하길. '내 자식은 내가 잘 안다'라는 말이 제일 위험해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솔직하게 나는 내 자식의 속마음도 사생활도 백 프로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카톡 대화도 아이들의 속마음을 다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왜 그 친구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답변을 했는지. 지금껏 알던 친구에게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성의없이 대화를 한 건 지. 그리고 친구없다는 고민을 한 것인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힉원 가기전 짧은 시간 내내 쇼츠를 멍하니 보는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 모든 질문조차 참 무색하고 공허하게 만들어 버리는 숏폼이다. 거기에는 아주짧게 잘려져 나간 약간의 진실만이 담겨져있을 뿐이다
나는 2024년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결국 나는 뭘 안다는 식의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대신 교육담당자인 선생님에게 '반 친구와의 상태를 지켜봐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에게는 스스로 문제를 풀돼 위급할 땐 언제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부모와 선생님이 있다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개입의 선을 지키는 게 부모와 어른들의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게 폰을 던져버린 오전 만이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기를 애써 바래보는게 부모마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