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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Sep 06. 2024

한 사람의 가치와 무게

아껴본 사람이 가치를 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시장에서 콩나물 값을 깎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잣값도 안 되는 몇 백 원을 아끼는 것이 구질구질해 보였다. 각종 포인트나 할인 모으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먼 곳까지 가서 싸게 사 오기보다는 가까운 데서 좀 비싸게 사더라도 편하게 사는 것이 더 났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영등포시장에 가서 감자를 사 오던 버스 안에서 데굴데굴 굴렀던 감자 이야기를 하는 엄마가 안타까웠다. 그때만 해도 차비를 아낀다고 택시대신 아기를 둘러업고 버스를 타던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줌마들이 느리다고 구박을 해도 엄마들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포대기는 얼마나 짱짱한지. 나는 교복을 입고 아줌마들이 손에는 버스 손잡이 손에는 비닐봉지 등에는 아기를 업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오지 않을 미래를 보는 것처럼 느꼈었다.

그렇게 학생이던 내가 어른이 되고 아기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8년 전에는 임신해서 한 손에는 큰 애 손을 잡고 다른 손은 버스 손잡이를 잡으면서 여성 버스기사한테 무한대로 구박을 받았다. 도무지 버스가 시간 맞추는 법이 없는 한가한 동네에서 임산부에게 느리다고 구박을 받다니, 서러움이 솟구칠 지경이었다. 나는 옛날

엄마들처럼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당당하게 맞받아칠 용기도 없었다. 그날 버스에서 딸아이는 불편하다며 칭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정말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면서 까지 우리는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아끼는 습관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아껴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도 돈도 주변 사람도 노력해서 아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잃어버려도 안타까운 그 느낌을 알지 못한다. 본인이 쿨하다고 느끼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다. 지나치게 아끼는 것만큼 초라해 보이는 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감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문제이다. 좀 더 현명하다면 아까운 감정은 알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는 버리는 선택이 늘 적절한 비중을 이룬다는 것이다. 쪼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기 위해서는 말이다.


좀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사람 목숨을 아끼는 병원이나 의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의사의 도덕성과 이성적 판단은 어느 정도까지가 적당할까. 사람을 정말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의사, 나는 현실적 한계 안에서만 치료하겠어라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의사. 멀리 아프리카와 오지까지 봉사하면서 약품도 병원도 없는 곳에서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 같은 직업이라도 판단은 너무나 다르다. 결국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는 의사 내면에서 나오니 말이다. 모든 전문직이 그렇지만 사람의 목숨을 다루기에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이 딜레마적인 문제는 파급력이 너무나 크다.


재난, 그 이후

미국에서는 2010년 세리 핑크라는 저널리스트에 의해 <재난, 그 이후>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동명의 영화는 애플티비에서도 볼 수 있다.

2005년 미국에서는 카트리나로 뉴올리언스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당시에 이 지역에는 76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메모리얼 메디컬센터가 있었는데 이 병원 역시 그 재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지을 당시부터 침수 가능성이 있었던 낮은 지대의 병원건물은 전력시스템이 지하에 있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긴 세월 그럭저럭 버텨가긴 했는데 결국 카트리나로 인해 병원전체의 전력시스템이 완전히 나가고 말았다. 병원에 전기를 없다는 것은 모든 중환자들을 위한 생명유지시스템이 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술실도 에어컨도 어떤 치료도 이루어질 수가 없는 병원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환자들은 병원에서 죽어나갔다. 급하게 구성된 병원 비상체계에 따라 비상탈출을 해야 하는데 생명유치장치를 달고 사는 노인 중환자들을 데리고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매뉴얼조차 제대로 없는 상태였다.


상황에서 의사와 간호사 병원책임자들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사실 의사와 간호사에게는 병원이 이렇게 된 이상 병원을 지키고 있을 의무는 없었다. 직업정신이고 뭐고 어떻게든 하나 살자고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탈출해도 붙잡을 수 없재난 상황이었다. 실제로 많은 의료진이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남은 의료진과 관계자들은 도덕과 의무감이라는 본분 하나에 매달려 병원에서 환자들과 사투를 벌인다. 에어컨이 없으니 부채로 대신하면서 남은 전력으로 이메일을 보내 구조를 요청하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상황에서 환자를 침대에 태워 옥상 헬기장까지 철제계단을 타고 올라가 헬리콥터에 신생아와 중환자들을 태워 다른 병원에 보낸다. (그 와중에 질병과 치료이력을 덧붙여서 작성하는 간호사들. 그들은 그나마 컴퓨터가 아니라 수기로 차트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위안한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체력에는 한계가 오고 찌는 듯이 더운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특히 야간에는 헬기장까지 올라갔다가는 직원이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어쩔 없이 야간 수송작전을 멈춘 이유 때문에, 병원은 구조순위에서 뒤로 밀리고  말았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이송된 환자들 조차 구급차가 연결이 안 되고 중간지대에 내려놓는 상황이었다.

사실 뉴올리언스에는 메모리얼 말고도 모든 병원이 다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것. 하지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통신도 안 되는 상황에서 종합재난관리시스템이 없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손발이 맞는 구조계획 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비교적 체계적인 시스템에서 할 일만 하면 되었던 병원 사람들은 그렇게 멈춰버린 시스템에서 멘탈이 붕괴되었다. 이 병원 관계자들이 얼마나 멘탈나갔었는지를 알게 것은 나중에 병원을 조사하러 나온 조사팀에 의해서였는데, 병원조사팀은 병원 예배실에 놓여있는 40구가 넘어있는 시신을 발견하면서였다. 시신들은 처음에는 재난 상황 속 병원에서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사실 그들 대부분은 의료진에게 치사량의 모르핀을 맞고 죽은 것이었다.


병원을 조사하던 팀은 병원 지하에서 비축되어 있는 생수와 음식이 많아서 놀랐다. 이 정도 양이면 사실 병원 내에 있던 사람들이 충분히 공급받을 양이었다. 심지어 자판기에도 음식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전력시스템 마저 사실 노력했으면 다시 복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조사팀은 밝혔다.

사실상 병원은 외부에 비해서 그렇게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병원 밖이 오히려 더 범죄와 약탈이 들끓었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넘쳐났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병원은 보안요원을 써서 대피하러 온 사람들을 나가라고 무참하게 내쫓는다. 다친 사람이건 죽어가는 사람이건 상관없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도 별 다를 것 없는 처지임에도, 가혹하게 출입을 막았다. 내부 사람들이 불안한 것에 비해 병원은 사실 보호되고 있었던 것.

5일째 되던 날  외과 의사 명은 병원 건물에 있는 또 다른 병원인 라이프케어(중증환자 요양시설) 환자를 두고 모든 간호사들을 탈출하라고  명령한다. 간호사들은 첵임감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지만 경찰을 대동해 간호사와 보호자까지 모두 내보낸 그들이 일은 '안락사'였다. 고통에서 환자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의무라는 믿음 아래 의식 있는 환자 없는 환자 모두에게 모르핀을 놓는다. 외과의사의 결정은 미국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는데, 실제로 의사는 '2급 살인'으로 법정기소되었다. 사람들은 병원 상황의 안타까움을 통감하면서도

의사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여러 차례 의문을 제기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도저히 가슴으로는 동감할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애플 TV의 드라마로 나온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사고를 지켜본 병원 관계자들이 사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유족에게 전화해서 사망사고를 알리는 장면을 보면서 감정이 복잡했다. 병원관계자들은 테넷이라는 회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지시에 따라 의무적인 보고를 한다.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도왔지만, 재난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이다. 중역들은 직접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는 것은 그날 현장에 있었던 간호사들이다. 전화를 돌리는 그들의 얼굴은 양심 때문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본인들도 살기 위해 어쩔 없이 선택을 했지만  유족에게 전화로 말을 해야 하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부담스럽고 힘들었던 것. 사실 그날 그 병원 병상에 누워서 생존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그 환자의 가치는 생각보다 무거웠던 것이다. 제대로 된 보호자나 본인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안락사와 사망진단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이 의료가 곧 돈인 미국에서 조차 말이다. 한 두 명이 아닌 40명 넘은 환자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라니 유족들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보호자들은 병상에서 자신들을 강제로 쫒아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럼에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의사보다도 요양병원에서 매일 중환자들을 씻기고 먹이고 담당했던 간호사들이었다. 무엇보다 심정적으로 환자를 그렇게 보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을 쉽게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DNR이라는 연명조치를

하지말라는 환자들은 그대로 병원복도에

방치되어 구조 순위에 오르지도 못했다

구조하려고 끌고갔던 환자중에

DNR이라는 이유로 다시 돌아오는

웃지못할 상황조차 벌어졌다

보호자들은 연명조치거부가 이런식의

방치는 아니었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글을 쓰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납득하기

힘들었던 부분이었다


이런 장면은 시청자이면서 독자인 마음속에서 오히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불러일으켰다. 생명의 무게가 그렇게 무겁다는 것은, 그 안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해 본 사람만이 그 생명의 가치를 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병원 이 상황이라면 뭐든 안 될 거라고 포기한 의료진이나 간호사가 있다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이유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종류가 아니다. 본인이 충분히 가슴으로 느끼고 아파해야만 있는 종류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르핀을 놓았던 외과의사 포는 똑똑했지만 한 가지는 몰랐다.

그 환자가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 지를. 죽어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에는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이유로 중환자는 모르핀을 세 번이나 버텼다. 눈도 뜰 수 없는 환자가 얼마나 강하게 버티고 싸우는지 옆의 간호사는 보았다고 했다. 그런 것을 직접 느낀 사람만이 안다. 만약 그들이 다시 실무직으로 돌아갔다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기소 이후에 외과의사 포는 무혐의 판정을 받았고 본인의 소원대로 다시 의사직에 복귀한다. 밥벌이 때문은 아니었다. 의사로서 자신의 직업을 도저히 버릴 없다고 본인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참 냉정할 정도로 무서운 이성이 아닐까). 그녀는 아마도 은퇴까지 계속 암환자들을 만날 것이다. 다시 환자를 진료하면서 그녀는 속죄를 했는지 수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들이, 우리가 그렇게도 전문직이라고 부러워하며 존경해 마지않았던 그 많은 종합병원 의사들이 환자를 떠났다. 메모리얼 사태가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라면 이것은 사람이 만든 의료재난이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르고 있다. 전공의들이 다시 돌아올까? 나는 인터뷰를 보면서 확신을 못 느꼈다.

대통령이 2000명 증원을 완전히 포기하고 무조건 돌아오라고 한다면 그들이 돌아올까?  나는 확신을 못 느꼈다. 그렇게 정부가 자신들의 노선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런다고 해도 일부는 직업이니 못 이기는 척

돌아오겠지만, 정말 정이 떨어지고 마음이 식어버린 전공의들, 마음이 이미 떠나버린 일부는 아마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대치하면서 사실상 방치된 의료상황은 뒤늦게 그 위급함이 불이 붙기 시작했다는 것도 늦은 것 처럼 보이는데 정부는 느긋하기만 하다. 시스템을 다시 구축하고 정상화 시켜야만 하는데,  공백 시간은 너무 길고 떠난 사람들의 마음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무조건 돌아오라 해도 회복될지 알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 기간에 목숨을 잃은 환자의 가족들의 마음을 누가 헤아려 줄 지도 모르겠다.

잡으려면 좀 더 빨리 잡아야 했고 그들의 가치를 좀 더 진지하게 다뤘어야 했다.

얼마 전의 정부브리핑처럼 없어도 돌아갈 의료현장이라는 식의 태도는 의정 갈등만 더 부추기게 만들었다.

결국 태도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의사가 소모품이 아니고 환자가 병상에 누워있는 자의식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응급실에서 그렇게 내쳐지고 병원에서 수술을 거부당한 환자도 홀로 일하는 의료진도 고통스럽기 마찬가지다.

사람의 목숩의 가치가 그렇게 가볍지 않다는 것을. 죽은 사람조차 책임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을. 결국 모두에게 정신적인 무게로 부가된 다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돈과 법에 관한 부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필수 의료 시스템 붕괴에서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모두는 깨달을 수 있을까. 겉으로만 아니고 진심에서 아마도 가슴으로 깊이 느껴야 할 것이다. 충분히 아파해야만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생각보다 의지가 강하고 누구도 본인의 동의 없이 그 의지를 함부로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그게 생존권과 존엄성의 기본정신이라는 것을.   

본인과 타인의 눈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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