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풍전고등학교 2학년 1반의 하루는 어느 공립고등학교 교실의 개학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된 첫날 이 반의 어수선함은, 지난 학기 2학년 1반을 맡았던 담임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병가로 인한 부재로 인해 그 정도가 더 심했다. 1학기를 담당했던 선생님은 이 교실을 지도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따라서 아이들의 기강은 해이해졌고 반 전체 성적은 바닥을 면치 못했다. 그 결과 2학기를 시작한 아이들의 첫 수업 시간 모습은 그야말로 무질서 그 자체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들은 수업 종이 쳤는지 안쳤는지도 모른 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거나 각자 휴대폰을 하고 있었고, 첫날부터 그야말로 의자와 책상을 침대 삼아 잠든 아이들도 있었다. 공부에 마음이 있는 몇몇 아이만이 귀에 헤드폰을 쓴 채 구석 쪽에 앉아 책을 펴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등교 자체가 매우 짜증 나는 일임이 틀림없었다. 차라리 학원이나 집에 있었으면 공부하기가 더 나았을 아이들이었다.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주는 효과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돌아보면서 교단 앞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교단 앞자리로 들어선 그분의 존재에 자신들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키 175 정도의 약간 머리가 경계를 넘은 40대 초반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전체적으로 하얗지만 살짝 붉은 뺨을 가진 선생님이었다. 아이들 눈에도 대놓고 비싸 보이지는 않지만 멋이 살아 보이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 때문에 짧은 순간에도 평범하지만 분위기를 주도하는 힘이 있었다. 너무 어리지도 너무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딱 중간 정도의 이미지에다가 자신의 강한 존재감을 알리는 듯한 선생님의 입장으로 인해 아이들은 일순간 조용해져서 선생님을 지켜보고 말았다.
선생님은 부드럽지만 약간의 권위를 담은 목소리로 첫마디를 열었다.
"다들 앉아"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 자기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이들도 눈을 한번 맞춰보고,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 끝에 마침표를 눌러 찍었다. 어렵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선생님의 필체는 그 자체로 힘이 있었다.
"선생님의 이름은 이현재다.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바로 지금 이곳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부드럽게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마치 무언가를 잠시 생각한다는 듯이 교단 앞을 천천히 걸었다.
"너희들에게 모든 수업에 앞서 이 교단에서, 한 가지 묻고자 하는데. 여기 있는 반 학생들 중에 몇 명이나 본인을 자유인이라고 생각하지?"
그 말을 듣는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유인'이라니 단어가 귀에 거슬리는 낯선 단어이기도 했거니와
현실 입시에 갇혀 사는 대한민국 고등학교 2학년에게 자유라는 것을 묻다니, 정말 해도 너무 한 질문 아닌가.
현재 선생님의 이 도발적인 질문에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손을 드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침묵시위 같은 것이었다. 선생님이 첫날 첫 교시부터 학생들의 아픈 부분을 긁었다는 것이 무척 신경 쓰였다.
"너희들은 1년 후, 만 19세가 된다. 법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뜻은 다 알고 있을 것인데, 여기에는
스스로가 자신을 통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
선생님의 질문을 들은 서윤은 살짝 짜증이 나긴 했지만, 잠깐 자신의 아침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 아침 2학기 첫 등교라고 엄마에 의해 강제로 일어난 자신 말이다. 아침을 헐레벌떡 대충 먹고 별 기대 없이 교실에 들어와 아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낸 자신 말이다. 아마도 오늘 오후에 수업을 마치면,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가 학원을 가고 다시 집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하루 끝. 쳇바퀴 돌리듯 예정된 일과에 갇혀사는 이 초라한 학생에게 무슨 통치고 나발이란 말인가. 괜한 지식인 흉내를 내는 선생님은 정말 싫다. 어휴..
서윤은 책상 밑으로 살짝 손을 넣어 친구에게 카톡메시지를 보냈다.
'야, 저 샘 뭐냐..?'
답장이 곧 왔다
'아, 몰라.. 짜증'
아이들의 표정이 심상찮은 것을 어느 정도 파악했음에도 현재 선생님은 흔들리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 더
센 말을 한마디 더 박았다.
"자유인의 반대는 노예다. 노예는 누군가에 의해 스스로의 운명이 결정되는 사람이다. 타인으로부터
물리적인 폭력, 통제, 심리적 가스라이팅 이런 게 다 그 수단이지. 2학년 1반 학생들 중에는 이러한 노예가 한 명도 없길 바란다."
이 말은 앞의 말보다 더 충격을 주었다. 노예라니.. 엘리트적인 이미지를 풀풀 풍기는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첫 수업에 들은 말이 , 본인이 스스로 노예라는 현실 대한 직접적인 직시라니(팩트폭력). 아마도 서윤과 그 친구들은 이걸 빌미 삼아 하루종일 서로 말장난으로 치고 놀아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소재였다.
"선생님은 너희도 눈치 챗겠지만, 정치와 법 수업 담당이다. 앞으로 수업 시간 많이 기대해도 좋다"
그렇게 현재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강렬하고 깔끔하게 끝났다. 그러나 선생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왠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장소 사건은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