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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Dec 14. 2023

내 편이 아닌 학교를 대하는 자세

버틸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

지금보다야 났다고 하지만 앤에게 새 학교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새 가정과 친구를 얻은 기쁨도 잠시 앤에게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야 할 과제가 놓여있었다. 에이번리의 작은 학교.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이었다. 나이야 11살이지만 정상적인 학습과정을 거쳐왔을 리 없는 앤 이기에 학교에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앤이 가진 것은 그나마 독서를 많이 했다는 것뿐. 그나마도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교과과정과는 한참 먼 것이었다.  그럼에도 앤은 특유의 에너지로 학교 가는 길을 여러 수사를 섞어 화려하게 표현해 낸다. 살아있는 것도 기쁜데 이런 날에 아름다운 길을 학교를 갈 수 있다니 말이야. 하는 말을 다이애나에게 하면서 말이다.


마릴라는 이런 앤의 뒷모습을 보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앤이 유별나서. 다른 애들과 잘 지낼 수 있으려나. 수업시간에는 또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을지. 학교를 처음 보내는 학부모의 마음이나 다를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첫날 저녁 앤은 별다른 문제없이 기분 좋게 돌아왔다.

여기 학교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선생님은 별로지만. 선생님은 프리시라는 학생만 좋아하고 다른 학생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지식한 마릴라는 선생님을 흉보는 일을 곧이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마릴라를 위해 앤은 자기 단짝과 앉았으며 친구들도 많고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업과정이 너무 떨어져 있다고. 그래서 창피하다고. 선생님이 받아쓰기를 하는데 자기 거만 높이 올려서 창피를 주었다고. 예의가 너무 없어서 분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밖에는 친구들과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3주가 흐르고 그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폭풍이 오기 전 평온한 대지처럼 말이다. 하지만 앤에게 검은 구름은 지평선 끝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곧 들이 닦칠 것처럼. 그 폭풍의 이름은 길버트 블라이드였다.

다이애나가 잘생겼다고 칭찬을 마지않는 그 애. 매번 1등을 한다는 그 애. 여자애들한테 못된 장난을 친다는 그 애. 못살게 괴롭힌다는 그 애. 하지만 다이애나는 그 괴롭힘 조차도 나쁘지 않다는 식의 대답이 앤을 의문스럽게 만들었다.


그날 교실에서 앤이 처음 본 길버트의 모습은 잘생긴 얼굴보다 앞자리의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악동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필립스 선생님은 길버트의 장난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여학생만 울 뿐이었다. 길버트가 자신의 잘못을 감추면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꾸미며 앤에게 윙크하는 모습을 날리자 앤은 정의감에 불타는 분노를 느꼈다. "길버트가 잘생긴 건 맞아. 하지만 너무 뻔뻔한 것 같아. 잘 모르는 여자애한테 윙크를 날리는 것은 예의가 없는 거지."

하지잠 진짜 사건은 그날 오후에 터지고 말았다.

필립스 선생님이 교실 뒤쪽에서 학생들에게 관심을 끄고 있는 사이 길버트는 앤을 향해 장난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괴롭히고 주의를 끌었던 여자아이들과 달리 앤은 길버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기 머릿속의 먼 환상 세계로 떠나 있어서 자기 머릿속의 황홀한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것. 길버트는 지금까지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본 적도 없었고, 또 시선 끌기에 실패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갸름한 턱에 커다란 두 눈을 가진 빨강머리 여자아이 앤 셜리만 빼고는. 자신의  예상으로는 그 아이도 다른 여학생들처럼 자신을 쳐다보아야 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길버트는 주의를 끌기 위해 앤의 머리를 잡아당긴다. 그리고 내뱉지 말아야 할 그 단어를 말해버리고 만다. 앤에게 '홍당무'라는 말을 써버린 것이다.

불같은 성질의 앤은 즉각 반응했다. 그때서야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길버트를 쳐다보더니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상상의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이 산산조각 났다. 앤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길을 길버트에게 던졌고, 화가 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비열한 나쁜 놈아. 어떻게 그런 말을!"

앤의 격한 외침 뒤로 그녀는 글씨는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치고 말은 것이다.

산산조각 났다. 석판은. 길버트의 머리 대신에.

하지만 에이번리 학생들은 난데없는 이 소동을 좋아했다. 이번 사건은 '특별히' 재밌는 것이었다. 요즘애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이런 사건 덕분에 조용하던 교실은 아이들의 신나서 소리 지르는 '와' 소리로 가득 찼다. 여자아이들은 울기 시작했고 단짝 다이애나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다음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앤의 어깨에 손을 털썩 얹더니. "앤 셜리.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되묻는다. (이 상황에서 성과 이름을 붙여서 읽는 것은 왜 그렇게 무서울까) 하지만 앤 셜리는 자신이 홍당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길버트가 역시 놀라긴 했지만 용기를 내서 자기가 놀렸다고 말했는데 필립스 선생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학생 중에 이렇게 고약하고 옹졸한 학생이 있다니 안타깝다고. 나머지 시간에 칠판 앞 교단 앞에 서있으라고. 당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처음 전학 간 학교에서 선생님에 의해 이런 창피와 굴욕을 참으며 교실 앞에 서있는 기분을. 앤은 이 상황을 차라리 매를 맞으라면 백대도 더 맞을 것 같다고.

필립스 선생님은 게다가 칠판에 다음과 같이 쓴다. "앤 셜리는 성질이 고약합니다. 앤셜리는 화를 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고는 읽을 줄은 모르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어린 학생들까지 큰 소리로 읽었다.

앤은 오후 내내 그 글씨 밑에 서 있으면서 울거나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화 때문에 이글거리는 눈빛과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아이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하지만 길버트 만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길버트가 하굣길에 사과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앤은 길버트를 비롯해 필립스

선생님에 대한 분노를 끊을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필립스 선생님과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필립스 선생님의 앤의 기분을 계속 건드렸고. 앤의 치욕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앤이 더 이상 학교를 가지 않기로 말이다.

마치 앤을 대표하는 에피소드처럼 되어버린 이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본다. 요즘 시대라면 앤이 삐뚤어지거나 정서장애나 트라우마를 가질 수 있을 만큼의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 사건이 웃으면서 추억담으로 회자될 수 있는 걸까.


지난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본다. 90년대 초반 한국은 번영하는 시대였으면서도 선진국으로 가겠다는 꿈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학교는 지난 88 올림픽의 성과와 경제적 성장을 이룬 자랑스러운 나라를 아이들에게 알리겠다는 목표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민학교생활은 어딘가 결함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군사적 분위기와 체벌에 대해 너무나 관대한 학교분위기 때문이었다. 학교 생활은 입학식부터 운동장 조례를 시작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교장선생님 훈화가 일반적이었다. 길면 한 시간 동안 서있어야 하는 조회를 입학부터 매주 한 번 운동장에서 치러야 했다. 학교와 선생님의 권위에는 애국가의 냄새가 섞여있어서 좀처럼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거기에는 강제성이 있었다. 지금 시대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린 학생들도 단체기합을 받았고 얼차려를 받았고 자로 손을 맞았다. 단지 내 잘못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한 것에 대한 연대책임을 모두에게 물은 것이다. 특히 반장은 반원들을 이끌지 못했다는 이유로 매번 책임을 지고 혼이 났다.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잘못했는지 사실대로 말하기가 겁이 났다. 솔직하게 말해서 선생님한테 이해받고 용서받는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혼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분위기는 8살부터 19살에 졸업할 때까지 1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운이 좋아 너그러운 선생님일 만난 적도 한두 번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선생님이 무얼 해도 반기를 들 수 없는 곳이 학교였다.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먼 옛날이야기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한 가지는 전학 간 학교에서 첫날 책상 줄을 잘 못 맞췄다는 이유로 나가서 선생님께 뺨을 맞은 사건이고 두 번째는 고등학교 시절에 복도 청소를 잘 못했다는 이유로 우리 반 반장이 나 대신 선생님에게 얼차려를 받은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남학생이 사실 우리 반에서 제일 믿음직하고 모범적인 친구였기 때문에 나 대신 벌을 받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실 내가 매를 맞는 것 보다도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일이었다. 지켜보는 나 역시 부끄러웠다. 그때 선생님들은 그때 학생들이 느꼈던 치욕감을 알고나 있었을까. 그 선생님들도 아마 80이나 90대 노인이 되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지난 일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그랬던 시대였으니까.


학교를 졸업한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어떤 학생. 나중에는 가수가 되고 변호사가 된 유명한 그녀가 잡지에 인터뷰를 한 것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자신도 중학교 시절 전학을 와 적응을 못하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음을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부모님의 응원과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저희 엄마는 제가 학교가 힘들다고 하면 언제든지 쉬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같이 여행을 떠나 주셨어요. 그런 엄마의 도움으로 학교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같은 환경에 잠시 놓였던 그녀가 그때를 회상하는 방법이 나와 얼마나 다른지 놀라고 말았다. 적어도 우리 집은 학교에서 혼나고 왔다면 일단 내 잘못을 추궁하는 분위기였으니까. 거기다가 그것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선언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엄마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떻게든 졸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철칙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친구가 마음에 안 들어도 학교가 별로여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먹고사는 일이 더 바빴으니까. 위로해 줄 가족이 없는 나에게는 학창 시절의 과거는 단지 블랙으로 남고 말았다.



앤 셜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일단은 마릴라는 앤의 등교거부 선언에 따르기로 한다. 자기 스스로 학교에 간다고 할 때까지 두는 것이다. 하긴 마릴라는 학부모보다는 한 발 떨어져 있는 입장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기껏 보낸 학교를 스스로 그만두겠다는 앤의 선언은 마릴라를 당황스럽게 했다. 앤에 대한 소문은 이 작은 마을에 이미 다 퍼져있어서 린드 부인에게 상의하러 갔을 때 이미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린드 부인의 이야기에는 필립스 선생님이 여자아이에게 너무했다는 입장도 있었다. 앤이 생각보다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지지를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래서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것인데. 일단 린드 부인은 필립스 선생님과 학교가 정상적이지 않은 면이 있으니 앤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판단한다. 마릴라는 이 충고를 듣고 더 이상 앤에게 등교를 강요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가고 앤도 역시 진정되어 간다. 예민한 앤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그나마 마릴라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이었다. 앤은 대신 이 시간을 학교에서 보지 못하는 친구와 관계로 채워나간다. 그러다가 하나뿐인 친구인 다이애나에게 실수로 와인을 먹이는 사건을 일으키고 다이애나의 엄마로부터 더 이상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친구를 잃어버린 앤은 몇 달 만에 학교에 다시 나가겠다는 선언을 한다. 다이애나를 다시 보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이기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씩씩하게 다시 학교로 간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간다. 선생님이 비록 자질이 부족한 편이었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을 좋아하지 않은 선생님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에도 필립스 선생님의 지적은 계속되었지만. 앤은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버텨 나간다. 마치 사탕을 먹기 위해 모든 채소를 참아내는 아이처럼 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감히 희생할 줄 아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길버트에 관한 분노만은 빼고 말이다. 학교에 관한 테마는 그녀가 학교 선생님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학생을 대하는 가의 문제로 다시 한번 변주된다

결론적으로 앤이 시련을 견뎌낸 그 방법이 결국 사랑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도 앤이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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